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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에는 세번의 살인이 등장한다. 자유분방한 여자친구를 살해한 남자, 안하무인의 아들을 죽인 아버지, 자기만의 청사진을 그려놓고 여자를 그곳에 끼워맞추려고 하는 불륜의 애인을 살해한 여자. 이들은 모두 타인과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 그들은 상대방에게 거의 잊혀진 존재나 다름이 없었다. 큐어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자신의 불만감으로 인해 쉽게 최면에 걸렸던 것처럼 절규에서도 마찬가지로 존재 자체의 무관심과 망각으로 인해 쉽게 유령에게 홀려 살인을 저지른다. 즉 그들은 영화속의 대사처럼 '모든 것이 없었던 것처럼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있어도 없는 존재, 누군가의 마음속에 기억되지 못하는 존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기에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타인의 존재도 함께 소멸(죽여)시킨다.

바다를 메우고 뭔가를 새우고, 있던 건물을 부수고, 다시 세우고, 텅빈 공간에 무언가 창조되고 파괴됨으로써 빠르게 변해가는 도시의 풍경속에서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는 속도의 세계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의 마음속에서도 타인과의 관계가 끊임없는 소통과 망각이 반복됨으로써 현대인들이 누군가에게 망각되어 간다는 것 혹은 잊어선 안될 것들을 잊어가고 있다는 것을 은유한다. 마지막에 요시오카만 혼자서 유령과 자신의 손으로 살해한 애인에게 용서를 빌고 구원을 받은 듯 하지만, 결국 빨간옷을 입은 유령은 요시오카를 제외한 전세계의 인간을 죽게만든다. 심지어 요시오카의 죽은 애인은 내내 선한 인상으로 남아있다가 그를 떠나기 직전에 유일하게 섬뜩한 귀신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결국 그녀는 그가 이 세상에서 혼자 남겨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 혼자 살아남은 요시오카는 정녕 구원 받은 것인가? 그래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해피엔딩을 가장한 절망적인 배드엔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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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에 등장하는 유령의 묘사는 가끔 너무 순진할 지경이어서 조소를 자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무섭지 않은, 아니 웃음이 나기까지 하는 유치한 유령이 스토리와 잘 어울릴때 그것이 어떻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지를 보여주지 않았나한다. 공포영화스럽지 않은 외피를 두른 공포영화인 구로사와 키요시 영화의 특징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나의 감독에 대한 무한애정 때문 일수도 있고
...

지진의 진동으로 시작되는 다른 세계와의 연결-불길한 기운이 감지되고 귀신이 나타나고 최면에 걸린듯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살인을 저지르고 깨어나는 현실을 그리는 영화의 분위기는 그의 다른 영화와 같이 만족스럽다. 절규의 재미는 큐어와 회로를 넘어서진 못하지만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들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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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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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슈퍼맨 귀신은 뜨악하기는 했고, 다이빙 귀신은 놀라웠다.

제목: 절규 (Sakebi, 2006)
감독: 구로사와 키요시

배우: 야쿠쇼 코지, 코니시 마나미, 이하라 츠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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