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라는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서 진정으로 무언가에 심취해서 열심히 했던 기억은 없어요. 그저 친구라는 이름에 세월이라는 단어에 흘러가다 보니 어느덧 주변에 남아있는 것은 술로 망쳐버린 내 몸과 그걸 비웃기라도 하는 듯한 빚 밖에 없더군요. 희망의 집을 찾은 것은 죽기가 두려워서도 현실에서의 도피처가 필요했던 것도 아니었어요. 지금까지 살아왔듯이 그냥 흘러들었갔을 뿐입니다.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는요.

저는 빌딩 숲이 만들어낸 회색빛 만남과 미래를 잊게할 술이라는 일순의 향락에 중독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담배에 중독되고 술에 중독되고 섹스에 중독되어 있었어요. 불행하게 삶의 소중함에 중독되지 못했고 사람에 중독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당신에게조차 중독되지 못했어요.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언가에 홀려빠져나갈 수 없는 중독과 마찬가지인데 어째서 당신에게만은 그럴수가 없었을까요.

아마도 당신은 시간이 지배하지 않는 느릿한 공간의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일겝니다. 당신을 사랑했었노라고 얘기할순 있겠지만, 당신이 살고 있는 세계는 나와는 너무 다른 것이어서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이 밉고 당신이 만들어낸 세계가 싫었던 것도 아니에요. 그저 익숙하지 않아서 두려웠을 뿐이에요. 그리고 그 때는 그걸 몰랐고요. 단지 두려웠어요.

당신은 당신이 만들어낸 세상을 나에게 남겨두고 이제는 또 다른 곳으로 가버렸군요. 당신이 없으니 이제 전 도시의 시간과 공간과 그것이 만들어낸 모든 것들의 중독에서 깨어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없네요. 전 이제 느릿하게 이 죄의식을 끌어안고 평생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해요. 그리고 눈물 흘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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