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학기잔학기 - 10점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수현 옮김/황금가지
정말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뉘우치기는 커녕 잡혀서 억울하다는 극악한 인간들을 접할 때가 있는데, 세상 어느 누가 사연이 없겠냐만은 그런 무자비한 인간들이라도 그렇게 자랄 수 밖에 없는 혹은 그렇게 만들어져버린 이야기를 듣게 되면 이해가 갈 때도 있다. 행위에 대한 처벌과 그 행위까지의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니까 말이다. 기리노 나쓰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괴물같은 인간들은 무서울 정도로 소름이 끼치지만, 책장을 덮을 때 쯤엔 그들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독자가 그들을 이해하게 만드는 기리노 나쓰오의 심리묘사는 정말 뛰어나다. 그녀의 작품들을 읽으면 마치 그녀가 그런 소수자의 대변자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이 아줌마 변호사를 해도 참 잘 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여자, 그것도 아이같은 가치관을 가진 여성을 그리다 거꾸로 몸은 아이지만(게이코는 35살인 현재까지도 한번도 섹스를 하지 않는다) 마음은 어른을 넘어서 지독한 상상력을 지닌 아이가 등장하는 잔학기는 그로테스크나 아임 소리 마마와는 또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다.

잔학기는 10살 여자어린이가 1년여간 납치/감금 당한 후 풀려난 뒤 그 때에 생겨난 뒤틀린 욕망과 상상력을 토대로 소설가의 길을 걷는 35살의 게이코가 주인공이다. 그녀를 납치하고 기타 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공장노동자인 겐지가 출소하고 그녀에게 '당신을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그녀는 잊고 있었던 그 때의 기억이 떠올라 자신의 체험담인 '잔학기'라는 소설을 남기고 자취를 감춘다.

이 소설에는 사건의 진실을 묘사하고 그걸 또다른 소설로 쓰는 주인공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타인(남편)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서술되고 일종의 반전을 이루면서 진실이란 결국 말로서 서술되는 것은 불가능하고 상상력을 통해 받아들이는 지극히 주관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얘기한다. 해서 주인공이 서술하는 이야기를 따라가며 진실이라 믿고 있던 독자는 마지막에 가서 정말 진실은 무엇일까라며 게이코가 그랬고 미야사카가 그랬던 것처럼 불온한 밤의 상상력을 펼치는 모습을 발견하며 키득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진실을 보지 않고-어쩌면 볼 수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한지 모를- 스스로 진실이라 상상하며 타인의 불행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섬뜩하고 본인조차도 스스로의 사건을 포장하고 기억을 왜곡시켜버렸으므로 결국 '잔학기'를 통해 기리노 나쓰오가 얘기하는 진실이라는 것은 결국 그 당사자에게조차 상상이라는 개념에 공감한다. 그리고 같은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다시 한번 전달되는 잔학기는 기리노 나쓰오의 다른 소설처럼 무엇이 진실인지 끝내 밝히지 않는다. 하지만 기리노 나쓰오 소설에서 같은 사건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변주되어 지는 것은 화자의 뒤틀린 욕망과 질투로 인한 상상력에서 기인하는 일종의 심리적인 컴플렉스이기 때문에 비슷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 다른 소설이나 영화와는 확실히 차별되는 지점이 생긴다.

잔학기는 어쩌면 소설을 쓰는 기리노 나쓰오 자신의 모습이 가장 많이 반영되어 있고 소설가로서의 그녀의 내면과 엽기적이라 할 만한 어둠의 상상력을 훔쳐 볼 수 있는 좋은 작품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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