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프이프 - 10점
이종호 지음/황금가지
매트릭스를 처음 봤을 때 '내가 네오라면 과연 현실을 더 알고 싶었을까'라고 생각했다. 나라면 그냥 매트릭스 속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일상을 살아갔을 것 같다. 지금도 많은 괴로운 현실에 슬며시 고개를 돌리고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이종호님의 소설 '이프'는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겪고 있는 아픔과 있을 것 같지 않지만, 너무나도 태연하게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폭력 속에서 허덕이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쓸쓸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날 '스벵가리의 선물'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첨부된 메일이 도착하고 여기에는 누군가의 생생한 자살현장이 담겨져 있다. 메일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봉인된 어떤 기억을 떠올리게 되고 그 기억이 해제되는 순간 자살을 한다. 우연히 자살현장을 연속적으로 목격하게 된 기자 도엽이 이 사건속으로 점점 발을 담그게 된다.

메일을 통해서 전달되는 공포, 기괴한 영상의 공포, 살인을 부추기는 인터넷 사이트, 이유를 알 수 없는 연쇄자살 사건, 자살과 구원을 담보로 모인 집단, 알수 없는 괴한의 전화, 화면을 뚫고 나오는 귀신 등등의 온갖 진부하기 짝이 없는 소재들로 채워져 있지만, 이 하나하나의 소재를 기가막히게 잘 엮어내고 있어 읽는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고, 개개의 사건사건 하나하나가 살아서 평행으로 나가는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다.

다른 사람한테는 보이지 않지만 특정인간에게만 보이는 동영상이란 소재에서 과연 이걸 마지막에 현실적으로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무지하게 궁금했는데, 역시 결론은 그것밖에 없었고 그 평범하고 수많은 영화에서 차용되었던 소재가 이런 식으로 결합하면 또 훌륭하게 탈바꿈할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그리고 후반부도 짤막하고 깔끔하게 마무리를 짓고 있어서 오히려 여운이 더 남는다.

제목이 말하고 있는 '만약에...'는 만약에 내가 좀 더 살 수 있다면, 만약에 그때 내가 좀 더 잘 할 수 있다면,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등등의 언어로 생략된 말을 확장해 볼 수 있겠지만, 그 '만약에'가 만약에 실현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 상황이 반복될 뿐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기에 '만약에'라는 공허한 절규로 밖에 들리지 않아서 책장을 덮고 난 뒤에 왠지 더 슬프고 쓸쓸해진다.

덧붙여.
- 번번한 글하나 쓰지 못하고 사채업자에 쫓기는 소설가, 에이즈에 걸린 여성, 뚱뚱한 외모를 비관하는 짝사랑녀, 아버지의 성폭행과 폭력에 얼룩진 여성, 성적을 비관하는 학생이 한명씩 자살을 하는데 역시 성폭행 이야기가 가장 마음이 아팠다. 수십년동안 폭력에 시달린 사람이 과연 어떻게 현실에 발을 디디고 살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면 눈물이 핑 돈다.

- 영화제작 판권이 팔렸다고 하는데 어떤 모양새를 하고 나올지 매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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