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터미네이터의 빠돌이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 꽤 좋아한다. 3편도 좋아한다. 그리고 영화는 칭찬해줄 수 있는 구석이 하나라도 존재한다면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혹자들은 액션은 완전 멋진데 내용이 완전 구려서 별로야라고 얘기를 하지만, 나는 내용은 별로지만 액션이 저다지도 멋지다니~라고 대부분 긍정적인 감상을 하는 편이다. 아. 내가 왜 변명을 하고 있지...

터미네이터4는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재미있었다. 현실적인 재난 영화와 테러를 연상시킬 정도로 소름끼치는 장면들도 있었고 그런 와중에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폭발적인 액션 장면도 많았고 거대한 숙명 또는 운명론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야기의 중심축을 크게 이탈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캐릭터를 등장시켜 전작들을 고루하게 답습하지도 않는다.

터미네이터3는 1편과 2편에 대한 단순 패러디에 가까웠고, 또 존 코너가 (찌질해졌다는 설정은 설득력이 있음에도) 너무 찌질거리는 통에 팬들의 반감을 사서 실패했지만 뭘해도 결국 예정된 각본데로 '망한다'라는 뜨악한 결말은 상당히 신선했다. 터미네이터4는 3편의 실패를 교훈삼아 전작들의 모습들을 정말 적절하게 변주하여 활용한다. 터미네이터가 타고 있던 오토바이와 트럭의 추격은 터미네이터가 오토바이 자체가 되는 것으로 변형되었으며 앞으로 등장할 T800 모델인 슈왈제네거의 등장은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면서도 영화의 개연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I'll be back의 활용도 귀여웠고, 무엇보다 생각지도 않았던 you could be mine이 흘러나올 때 느껴지는 그 상쾌함이란!

그러니까 터미네이터4편은 시리즈 영화가 가질 수 있는 매력을 최대한 활용한다. 바닥에 깔려있는 소품 하나하나부터 인물들의 대사에 이르기까지 세월의 무게가 켜켜이 쌓여있다. 카일 리스가 내가 당신을 지켜줄께요라고 하자 지금까지 줄곧 지켜줬잖아요라고 말하는 존 코너의 대사는 84년부터 시작된 터미네이터 이야기만이 가질 수 있는 짜릿함이다. 게다가 마지막 오리지널 스코어의 울림과 스탠 윈스턴을 기리며라는 자막까지.

또한 반만 기계인 사이보그 마커스의 캐릭터로 인간다움에 대한 물음을 던져 주기도 한다. 마커스가 기계인간이 된 것에 대해 충분한 설명이 없었다라는 이야기들이 많은 것 같은데 죄의식이 가득한 사형수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캐릭터의 여백은 어떤 상상으로든 채워질 수 있을 것 같다. 사이보그의 존재론적 물음은 이제는 너무 익숙한 것이기도 하고.

정말 유출이 된건지 마케팅의 일환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애초에 유출되었다는 결말대로 존 코너가 사이보그가 되는 마무리가 더욱 잘 들어맞는 듯 싶다. 팬들은 존 코너를 돌려달라고 떼를 썼을지도 모르겠지만 마커스의 존재에 더욱 무게가 실리고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은 한층 뜨거웠을 테니까.

덧붙여
 -. SFX가 발전하고 허접했던 장면들이 실제와 거의 똑같게 스크린에 구현이 되면서 액션 영화들은 점점 공포영화가 되어가는 것 같다.
 
-. 크리스챤 베일의 연기에 불만은 없지만 쨋든 배트맨 목소리는 다른 영화에서는 버리는 연습이 필요할 듯 싶다. 성대모사하는 기분이 들잖아.

-. '로그'에서는 거의 듣보잡 이미지였는데 마커스역의 샘 워딩턴은 정말 멋지다. 연기도 안정적이고. 마이클 아이언사이드를 비롯하여 조연들도 다 맘에 든다. 대사는 많지 않았지만 캐서린 브루스터역을 클레어 데인즈에서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로 교체한건 정말로 잘 한듯.

-. 아차. 가장 중요한 것. 집에 빵빵한 스피커가 없다면 막 내리기 전에 반드시 극장에서 감상할 것. 허접한 음향기기로 소리 쬐끔 키워놓고 본다면 이 영화는 그냥 안본거나 마찬가지다.

제목: 터미네이터4 (Terminator salvation, 2009)
감독: 맥지
배우: 크리스챤 베일, 샘 워딩턴, 안톤 옐친, 문 블러드 굿, 마이클 아이언사이드, 헬레나 본햄 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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