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에 심드렁하고 시니컬한 남자가 매일 매일이 반복되는 시간의 구렁텅이에 빠져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는 이야기인 사랑의 블랙홀은 굉장히 재미있는 코미디 영화이기도 하고 인간이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진심이라고 역설하는 철학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성촉절을 무한반복하여 살게된 필에게 최초의 얼마간은 즐거움의 연속이다. 마을의 모든 일상의 흐름을 신처럼 알고 있는 필은 마음에 드는 여자와 밤을 보내기도 하고, 은행에서 손쉽게 돈을 훔쳐내기도 하고, 술 먹고 하고 싶은데로 난동을 부리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에게 지루함만큼 큰 적이 또 어디있겠는가.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어서 행복한 이유는 망각은 일상을 새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일한 하루 밖에 살 수 없는 필에게는 망각은 커녕 일상의 한올한올이 더욱 짙게 새겨지고 결국 삶을 지옥이라고 느끼게 만들어 버린다. 극단의 피로속에 자살을 하지만 목숨을 끊어도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런 그가 이 지루하고 지옥같은 성촉절의 하루를 벗어날 수 있었던 계기는 타인을 대함에 있어 100% 스스로의 선의로 좋은 일을 하고, 혹은 사랑을 행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자신의 현재의 모습은 스스로가 들어낸 것이기도 하지만, 타인의 시선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 아무도 없이 홀로 남겨진 공간에서 인간은 타인과 섞여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표정을 만들어 내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필은 다른 사람을 전혀 신경쓸 필요가 없는 이 공간에서 도리어 스스로의 마음을 정화해 나가면서 내일이면 상대방이 기억하지 못할 사랑을 수천날의 공을 들여 고백을 하기도 하고, 내일이면 자기 자신 이외에는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선행을 마을의 이곳저곳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행한다. 그는 이 작은 마을에서 말 그대로 신만이 할 수 있는 그런 일을 행한다. 그러니 사랑의 블랙홀은 이 재미있는 코미디의 상황을 가지고, 관객에게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솔직한 맨가슴으로 타인을 사랑하고, 타인에 대해 한없이 관대해지라고 얘기한다. 재미있고, 멋있다. 그런 사랑, 하고 계십니까?
덧붙여.
-. 영화속에서 성촉절은 정확히 38번 반복된다고 하는데, 대략 10번 정도 이 영화를 봤다고 한다면 그 지겨운 라디오의 모닝콜 노래를 380번이나 들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나도 400번 정도는 들었을 것 같다.
-. 앤디 맥도웰을 별로 좋아하지 않음에도 영화가 좋아서 그런지 이 영화속에서 그녀는 반짝반짝 빛난다.
-. 빌 머레이만큼 능청스럽고 시니컬하고 허무주의에 빠졌을 법한 캐릭터를 그럴듯 하게 연기하는 배우는 아마 없을 듯.
감독: 해롤드 래미스
배우: 빌 머레이, 앤디 맥도웰, 크리스 엘리엇
'非 HorroR-movi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상] 미션 임파서블3와 토끼발 (6) | 2009.09.01 |
---|---|
트루 로맨스 (1993) - 그들 각자의 영화관 (14) | 2009.07.27 |
똥파리 - 욕 없이 살 수 없는 세상 (4) | 2009.06.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