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5 - 10점
김종일 외 지음/황금가지

공포소설이든 영화든 간접체험자가 효과적으로 공포라는 감정에 이입되기 위해서는 이야기 자체의 흡입력, 혹은 캐릭터의 매력으로 인해 극에 빠져들게 하거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정서에 호소하는 방법들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공감을 형성할 수 있는 방법은 익숙한 것을 차용하는 것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 가볼 수 있는 장소 혹은 들어본 장소에서는 생경한 사건이 벌어지더라도 공감할 여지가 충분하다. 한국공포문학단편선이 소중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익숙한 것들의 공포.

이전과 같이 김종일의 단편으로 포문을 연 이번 단편선은 대체적으로 만족스러웠지만, 몇몇 아쉬운 작품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괴담을 변용해서 슬래셔 스타일로 마무리짓는 방식을 보여준 이종권의 '오타'는 너무 평범했다. (괴담을 막장까지 밀어부치는 방식은 '어느날 갑자기' 시리즈가 짱인듯) SF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재난 형식으로 풀어낸 임태훈의 '네모'와 엄길윤의 '벗어버리다'는 독특한 생각을 엿볼수는 있었지만, 공포소설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았나 싶다. 전달하고자하는 메시지도 설득력이 약한 듯 보였고.

언제나 주목하고 있는 김종일의 '놋쇠황소'는 이전작품에서도 그랬듯이 사회적인 문제를 복수이야기로 풀어낸다. 마무리는 첩보영화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설정이었지만, 흡입력은 정말 좋다. 이전 도둑놈의 갈고리처럼 후련하다. 첫 이야기로 적절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이종호의 '오해'는 왕따를 당하는 딸아이의 부모가 겪는 고통과 무기력함을 그려내는데 시작부터 마지막 반전까지 유려하다. 한국공포문학단편선을 읽으면 언제나 신인작가들이 포진해 있는지라 전문작가의 글냄새가 느껴지지 않는 글들이 많은데(그것이 매력이기도 하지만) 매 단편선에서 확실히 이 사람의 작품은 뭔가 다르구나라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니까 거칠지만 막나가는 B급영화와 잘 정돈된 웰메이드 영화와의 차이랄까.

황태환의 '살인자들의 요람'은 정체모를 외부의 적들을 피해 숨어든 오두막에서 자신을 사지절단해서 죽일지도 모를 살인마를 기다린다는 슬래셔스러운 분위기를 가지고 진행되다가 반전을 통해 이야기 전체를 뒤집는 재기발랄함과 사회 문제에 대한 묵직한 시선을 느낄수 있는 작품이다. 예비 딸아이의 아빠라서 그런지 이런 문제를 다룬 작품을 보면 가슴이 정말 아프다.

우명희의 '늪'은 독재시절 고문기술자로 명성을 날리던 형사와 그에게 고문기술을 가르쳤던 유령같은 전임자와의 대결을 통해 아직도 죽지 않고 떠도는 암울한 시대의 망령을 소재로 한다. 우명희의 작품은 들개에서도 느꼈지만, 코밑에서 피냄새가 나는 듯이 고통을 날것처럼 느껴지도록 효과적으로 묘사한다. 합법적인 고문이 자행되던 시기가 몇년 지나지도 않는 상황에서 읽는 이런 작품은 정말 무섭다.

이번 시리즈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작품은 장은호의 '고치'다. 러브 크래프트의 소설 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기괴한 분위기의 마을이 춘천 근처에 있다니 참으로 반가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그 마을의 잔혹함은 이토준지 만화에서나 보던 것이다. 작품의 주제나 뭐 이런 것을 떠나서 순수하게 공포소설 본연에 충실한 작품이다. 결말은 다소 밋밋하지만, 그런 평범한 결말을 버리는 것도 쉽지는 않을 듯. 아무튼 재미있다. 이 시리즈에 대한 빠심이 너무 큰지라 객관성은 떨어지지만, 여름에 공포문학단편선 한권 정도 읽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니, 올해도 다시 한번 강추한다.

호수는 여전히 넓고 검다. 아무 것도 살 것 같지 않을 정도로 검다.
"낚싯대도 없는데 어떻게 고기를 잡는다는 겁니까?"
남자는 밀짚모자에 숨겨진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본다.
"제 발이 낚싯대에요. 비가 와야 고치가 많이 올라오지만, 이러고 있으면 세시간에 한마리는 물어요."
"문다고요? 발을.....말입니까?"
"네, 사람먹는 물고기니까요."
                                                                                              - '고치' 본문 중

덧붙여.
-. KBS의 김경란의 라디오 독서실에서 한국공포문학단편선4에 실려있던 이종호의 '플루토의 후예'와 김종일의 '도둑놈의 갈고리'를 방송했다. 라디오 극으로 들으니 또다른 재미가 있는 듯. 다시듣기는 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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