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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망받는 교수 존은 동료 교수들에게 연락도 없이 어느날 훌쩍 떠나려고 한다. 짐을 꾸려 출발하는 그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친구들이 하나씩 오고 송별회를 벌인다. 이유를 묻는 동료들에게 존은 얘기한다. 자신은 크로마뇽인이라고. 14,000년 동안 죽지 않고 살아온 불사의 존재고 자신이 늙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키지 전에 10년 주기로 이동한다고. 코웃음치던 동료들은 그의 얘기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논리적'으로 틀림이 없자 서서히 그의 말을 믿기 시작한다.

아내를 잃은 심리학자는 불사라는 그의 말을 장난으로 여겨 화를 내기도 하고, 역사학자는 그에게 궁금했던 역사속의 비밀을 묻기도 한다. 그가 말을 건네면 생물학자와 역사학자, 지리학자는 자신의 지식으로 그의 말에 살을 붙이고 신화를 만들어간다. 얘기의 주제가 종교로 옮겨가자 신성모독이라며 신학자는 화를 내고, 급기야 눈물을 보인다.

리차드 쉔크만 감독의 맨 프롬 어스는 하나의 방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몇명의 인물이 대화를 주고 받으며 극을 이끌어가는 대단히 절약적인 영화다. 12명의 성난 사람들이나 폴란스키의 진실처럼 이야기도 꽉 짜여져 있어 대화로만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의 갈등이나 긴장감도 흥미진진하다. 굵직한 미국 역사 사건의 현장을 돌고돌며 스펙타클하게 진행됐던 포레스트 검프를 전지구적으로 시간을 늘이고 공간을 축소했다고나할까.

존을 제외한 8명의 인물들은 존의 이야기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확증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의 '말'에 논리적 헛점이 없음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14,000년이나 그가 불사의 존재로 있었다는 사실을 손쉽게 믿어버린다. 그러니 종교 운운하는 존의 얘기를 빌리지 않더라도 이 영화는 사람의 믿음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 그리고 그 얄팍한 만큼이나 쉽사리 신화로 승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장치를 더욱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등장하는 신학자는 그에게 신성모독이라며 분노를 내뿜지만, 화를 내며 우는 행위 자체가 이미 그녀의 믿음이 흔들렸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성서 대부분의 이야기를 사실이라고 믿는 그녀의 가치관은 철저한 논리와 언변으로 무장한 한명의 인간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니 종교를 믿는 인간이란-종교 자체가 아니라- 얼마나 간사한가 혹은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 의심하게 만든다.

화성에서 온 인간, 우주에서 온 인간 따위가 아니라 재미있게도 지구에서 온 인간이 만들어내는 공상과학적 상상력은 내부로부터 우리를 사유하게 만든다. 맨 프롬 어스는 그런 힘이 있는 영화다.

첨언.
-. 캔디맨의 토니 토드를 오랜만에 보니 반갑니다. 많이 늙었지만 굵직한 목소리가 여전히 마음에 든다.

-. 존의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영화의 후반부에 밝혀지긴 하지만 이 또한 분명치 않다. 이 영화는 참 여러가지로 빠져나갈 구실을 많이 만들어 놓은 영리한 영화다. 어쩌면 무책임할 수도 있고. 하지만 생각할 꺼리를 던져주는 것만으로도 영화를 보는 이들은 얼마나 재미있어하는가.

제목: 맨 프롬 어스 (The man from earth, 2007)
감독: 리차드 쉔크만
배우: 존 빌링슬리, 엘렌 크로포드, 토니 토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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