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만에 영웅본색이 재개봉을 했다. 삐짜비디오로 보고 출시비디오를 사고 DVD로도 수십번을 보았지만(어림잡아도 40번 정도는 족히 보았지 싶다.) 스크린으로 영웅본색은 처음보았고 그것은 전혀 다른 영화였다. (내가 스크린으로 처음 본 것은 영웅본색2였다) 스크린으로 보면 대개 액션이나 미쟝센이 강렬하게 다가오지만 드라마가 폭발하는 것은 처음 경험한 것 같다. 더불어 배우들의 연기도.

홍콩느와르를 만들어내고 양산하는 신호탄이 됐던 영웅본색은 액션이 그리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영화는 아니다. 그것은 오우삼이 액션의 기름기가 빠진 진중한 영화를 노리고 만들었다기 보다는 본격적으로 액션을 펼치는 것에 대해 조금 눈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일게다. 그렇기에 결과적으로 영웅본색은 총질이 난무하는 영화들에 괴리감을 느끼는 관객들에게도 무난히 다가갈 수 있는 멋진 영화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비현실적인 몸사위가 펼쳐지는 영화들도 열광할 정도로 좋아하지만, 마음 속에 깊이 각인 되는 것은 역시 이쪽이다.

액션 장면을 멋내지 않으면 현실에 가까워진다. 현실에 가까워진다는 말은 실제로 그런 장면이 발생한다기 보다는 화면의 고통(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이 온전히 관객에게 다가올 가능성이 많아진다는 말이다. 주윤발이 붉은색 네온싸인이 밝혀진 빌딩의 옥상에서 이자웅에게 린치를 당해 쌍코피를 터트리는 장면은 멋지기도 하지만 상당히 고통스럽다. 이건 마치 고어영화를 보는 듯한 효과까지 불러일으킨다. 끔찍하기도 하지만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그런데 영웅본색에서 이런 효과는 멋을 부리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보통의 액션 영화들에서는 때리는 것도 멋을 부리지만 맞는 것도 얼마나 멋지게들 맞는가.. 썬글라스의 킬러와 1:1 대결을 펼치면서 죽음의 순간에서도 성냥개비를 빼어물만큼 후카시를 펼치던 영웅본색2와 비교해도 영웅본색1편의 주윤발은 멋을 부리지 않아 담백하고 소박할 지경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자연스런 멋을 풍긴다.

스크린으로본 영웅본색의 재발견은 단연 주윤발이다. 이제는 헐리웃 블록버스터에서도 얼굴을 볼 수 있는 그에 대해 새삼스럽긴 하지만 내가 좀 충격을 먹은 것은 그가 겁이 없는 영웅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주윤발은 영화속에서 조직의 보스급에서 보스의 차창이나 닦아주고 푼돈을 받고 지하주차장에서 끼니를 때우는 신세로 전락하는 갭이 큰 역할을 맡고 있다. 그 양극 속에서 주윤발이 보여주는 표정은 정말이지 스펙타클하다. 여비서에게 농을 걸고 위조지폐로 담배불을 붙이며 짓는 능글능글하고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에서 먼지 쌓인 주차장 한켠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적룡을 바라보는 애절한 눈빛까지.

주윤발이 맡은 소마는 겁쟁이지만 그것을 외부로 들키고 싶지 않은 자존심 강한 인물이다. 그는 두려울 것 없는 영웅이 아니라 스스로 신이라고 믿는 자신을 지키고 싶어 안간힘을 쓰는 나약한 인물이기에 그의 손에 들려진 총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무기이다. 매순간순간 총을 한발 쏠때마다 주윤발의 표정이 얼마나 절박한지 스크린으로 보면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두려움을 이겨내려고 노력하고 이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얼마나 안간힘을 쓰고있는지 그가 감내하는 고통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와 가슴을 아리게 만든다. 주윤발의 연기는 한마디로 발군이다. 이건 반드시 스크린으로 봐야한다.

무협영화 시절부터 큰형님스러웠던 적룡과 천상 막내의 풋풋함과 고집스런 당돌함을 내뿜는 장국영 사이에서 둘째형의 가교역할을 튼실히 하고 있는 주윤발은 멋내지 않아 더욱 멋있다. 멋찌다 멋쪄. 사람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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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영웅본색 (A better tomorrow, 1986)
감독: 오우삼
배우: 적룡, 주윤발, 장국영, 주보의
-. 30여명 정도의 관객이 들어찬 허리우드 극장에서 봤는데 옆자리에서 감격에 겨워 훌쩍 거리는 팬심어린 이들과 함께 보니 더욱 재미있었다. 뭐랄까 예전에 홍콩영화가 컬트가 되어버렸던 그 시기에 3류극장에서 빵빠레를 빨아먹으며 보던 기분이 조금은 느껴졌다고나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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