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니 게임시골로 휴가를 가는 차 안에서 클래식 음악을 서로 틀어주고 제목을 맞추는 부부. 전원적인 풍경과 고상한 음악으로 시작하는 영화의 오프닝은 크레딧이 올라가자 광기의 울부짖음으로 가득찬 메탈음악으로 전환된다. 화면속의 가족의 평화로운 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음악은 계속된다. 아내는 카스테리오의 CD를 뽑고 다른 음악을 삽입하지만 역시 음악은 그들의 행동과 상관없이 메탈음악이 흐른다. 퍼니게임의 오프닝은 이들이 앞으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폭력의 한복판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 가족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시스템은 이미 마련되어 있다는 뜻이고 관객은 물론이고 영화 속의 주인공 조차도 빠져나갈 수 있는 선택권과 결정권이 없음을 의미한다.

평화로워 보이는 세가족에게 새하얀 옷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청년들이 찾아오고 가정은 붕괴하기 시작한다. 이 청년들은 예의 바른 언행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불편한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렇게 말로는 표현하기 쉽지 않지만 심리적인 균열을 겪는 순간 이미 폭력은 시작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겪는 답답함과 불안은 타인에게 설명할 수 없다. 거대한 폭력은 그렇게 찾아온다.

이렇게 말하지 못하는 답답함은 오히려 가해자로부터 폭력이 자행되는 순간 가해자들이 스스로의 존재를 규명하는 꼴이 되어 속이 시원할 지경에 이른다. 이런 식의 불안감은 영화가 끝날때까지 반복된다. 관객의 상상을 배반하고 장르를 뒤틀고 이미지를 전복시키며 폭력이 어떻게 인간을 부셔버리는지 처절하게 보여준다.

퍼니게임은 지독히도 영리하고 잔혹하게도 폭력의 결과물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옆집의 죽어있는 가족의 모습도 보여주지 않고, 가족의 아들을 총으로 쏘고 나서도 시체는 보여주지 않고 오열하는 가족만 지독한 롱테이크로 보여주고, 남편을 죽일 때도 그 현장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게 관객에게 익숙한 장면 전환을 배반하면서 상상하도록 만들고 가해자는 관객에게 살인게임에 동참하도록 만들면서 말을 건네고 폭력의 공간을 영화 바깥으로 확장시킨다.

도망간 아들은 다시 잡혀오고 죽음을 당하고 도망간 아내도 다시 잡혀와 죽음을 당한다. 가해자를 죽이더라도 리모컨으로 영화 자체의 시간을 돌려 버리고 상황 전복의 순간은 다시 뒤집어지며 영화를 더욱 절망적으로 만든다.

그러니까 퍼니게임은 거대한 폭력은 그럴듯한 외피를 쓴 존재가 사람의 심리를 비집고 들어와 내부를 균열시키며 붕괴하도록 만들며 그것은 결코 빠져나갈 수도 없는 것이며 그러한 폭력은 이미 우리 사회의 저변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리모컨으로 영화를 거꾸로 돌리는 재기발랄한 장면도 그렇지만 메탈음악이 울려퍼지는 영화의 오프닝과 클로징의 간단한 장면만으로도 그것을 절절하게 느끼게 해준다. 퍼니게임은 정말이지 지긋지긋한 영화다.

제목: 퍼니게임 (1997)
감독: 미카엘 하네케
배우: 아노 프리시, 수잔네 로타르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