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 - 8점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김주영 옮김/씨네21
알라우네 Alaune – 무고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교수형에 처해진 남자가 흘린 정액에서 피어난 전설의 식물, 알라우네를 뽑으면 무시무시한 비명이 나는데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죽는다. 하지만 뽑힌 알라우네를 정성스럽게 돌봐주면 주인에게 많은 행복을 가져다 준다.

원죄(억울한 죄) 피해자와 그 가족을 돌봐주는 단체의 나미키. 살인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질타 받고 억울하게 소중한 사람까지 잃은 상처입은 피해자들이 세상 속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상담을 해주고 힘을 키워주는 원죄 피해자 지원단체의 나미키는 그가 도와준 피해자들이 도리어 세상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회를 이쪽편과 저쪽편으로 나누는 극단적인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강화하여 자기 편이 아닌 사람은 모두 적으로 간주하여 살인도 불사하는 괴물(알라우네)로 자라나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렇게 괴물로 각성된 세명의 여자 아이를 살해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알라우네를 뽑아내어 이용하려는 그의 애인 아카네가 그의 음모를 눈치 채고 그를 죽이려 한다.

이치모치 아사미의 '귀를 막고 밤을 달린다'는 하룻밤 동안에 일어나는 연쇄살인의 괘적을 살인자의 시점으로 그리는 소설이다. 사회적 피해자에서 후천적 싸이코패스로 자라난 여자들을 죽이려는 그의 동기 자체가 스스로가 괴물(연쇄 살인범)이 된다는 모순 속에서 출발하기에 이 살인의 여정은 혼란으로 가득차 있다. 모든 살인은 계획 없이 상황에 맞추어 즉흥적으로 진행되기에 이 혼란과 모순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심화되고 이는 이 소설에 독특한 긴장감과 재미를 부여한다.

이 소설에 뛰어난 논리로 무장하거나 범인의 상식을 초월하는 지적유희는 없지만 모자라다 싶을 정도의 지식과 행동으로 완전 범죄를 꿈꾸는 평범한 사람이 연쇄살인범으로 변모해가기에 변태과정은 오히려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이 어설픈 살인자는 필연적으로 경찰에 잡힐 수 밖에 없기에 완전범죄을 완성하기 위한 스릴은 없지만, 그렇기에 그의 심리에 더욱 주목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원죄 피해자의 자식은 그가 살인자의 씨라는 이유로 세상으로 부터 천대 받게 된다. 멸시 당한 자식은 또다른 의미로 세상으로 부터 원죄를 얻게 된다. 상처입은 자는 자신 안으로 숨어들고 세상을 모두 적으로 돌린다. 그것이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면 그는 진짜로 범죄자가 된다. 그리고 범죄의 대상은 그를 제외한 모든 나머지이기에 세상 사람들의 손쉬운 손가락질은 결국 구부러져 자기에게 돌아오게 된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그러니 손쉽게 타인을 멸시하는 행위는 그 자신에게 칼을 꼽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소설의 숨겨진 이야기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원죄의 피해자들이 고통을 벗어나는 과정에서 괴물이 된다는 설정이 다소 불편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피해자를 온전히 사회로 복귀시키는 것, 즉 트라우마를 벗겨내는 것이 오히려 괴물이 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반증으로 읽힐 수도 있겠다.

살인은 한번이 어렵지 일단 그길에 들어서면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말은 겪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우리삶의 대개의 것들은 처음이 설레고 두려운 것이고 매사는 늘 둔감해지기 마련이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살인에 대한 이와 같은 문장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일반인이 연쇄살인범으로 변모해가는 모습과 그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은 위험하지만 언제나 흥미롭다. 세련된 문장으로 다듬어진 소설은 아니지만, 살인범의 즉흥성을 나타내듯 짧게 끊어진 거친 문장들로 이루어진 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는 독일의 알라우네 전설이 현실에서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생각보다 근사한 반전도 갖추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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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본방을 사수하며 열심히 시청한  MBC의 납량특집 드라마 '혼'이 얼렁뚱땅 아스트랄한 결말로 막을 내렸다. 뜬금없는 추격전으로 시작하여 과거로 넘어간 드라마 1회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얼개를 보이더니 급기야 마무리도 짓지 않고 부랴부랴 끝나버렸다. 마무리 부분에 있어서는 어떤 비난을 받아도 할말이 없는 드라마지만 다루었던 소재와 주제, 참신한 캐릭터는 어쨋거나 의미가 있었고, TV에서는 유례없었던 잔인한 묘사를 통해 또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드라마 주인공이 단순히 정의를 행하는 인물이 아니라 반인륜적인 범죄에 대해 사회가 안고 있는 분노를 대행한다는 대리자 혹은 희생당한 자신의 과거에 대한 복수를 정의의 이름으로 행한다는 선도 악도 아닌 다층적인 인물이 주인공이라는 것은 이례적인 것이었고, 최면과 빙의를 결합하여 범죄자를 처단한다는 설정도 참신했다. 현재 공포라는 장르에서 트렌드라고도 할 수 있는 싸이코패스 범죄자들과 그에 대한 죄의 무게를 저울질 했고, 단순 살인의 나열이 아니라 그것을 학교로 부터 정치, 자본의 영역까지 확장시켜 현실의 문제를 반영하며 잊혀졌던 사건을 돌아보는 계기도 되었고, 돈으로 사람도 죽이는 현실도 풍자했다.

1회에서 전형적인 괴담류의 오컬트로 시작한 드라마는 영리하게도 귀신보다 사람이 무섭다라는 것을 증명하려는듯 2회부터는 틀에 박힌 귀신들을 배제시키고 사람의 악행을 부각시켰다. 양복입은 뱀이라는 사이코패스 인물을 김갑수의 구렁이 같은 호연을 통해 제대로 각인시켜 주었고, 범죄의 희생자들이 한평생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지, 그에 반해 범죄자들은 얼마나 손쉽게 사회로 다시 복귀하는지를 보여주었다. 못 가진 자는 진실도 알지 못한체 돈에 의해서 얼마나 쉽게 죽어나가는지도 보여주었다.

물론 이 같은 묵직한 함의에 비해 외피는 허접한 것도 많았다. 특히 스턴트나 액션 장면은 조소할 수준이었고,  툭툭 끊어지는 장면들도 많아 매끄럽지 못했으며 몇몇 인물들의 심리 변화나 행동은 도저히 공감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은 어쨋거나 주변에 널려 있는 범죄를 소재로 하여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공중파 드라마 속에 녹여내었고, 고루한 귀신 이야기를 답습하지도 않았으며, 파격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살인 장면을 묘사하며 범죄의 무서움과 복수의 쾌감을 시청자에게 전달했다.

낙태와 성폭행 등의 사회문제를 끌어들였던 M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MBC에서 참신한 드라마를 보여주었다. 시청률이 그다지 좋지 않아 내년에도 이런 식의 납량특집 드라마를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의 시도를 가지고 돌아온다면 장르 팬으로서 언제든 환영하고 기다리고 있겠다. 수고하셨습니다.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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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샤넬은 그녀가 디자이너로서 성공하기 이전의 삶을 다룬 영화다. 고아였던 어린 시절을 지나 뮬랭의 클럽에서 가수 생활을 하고 그 후 한명의 귀족과 한명의 사업가와 연애를 하고, 그에게 경제적인 원조를 받아 성공하기 까지의 삶의 궤적을 그리는 영화다. 그러니 이 영화는 관객들이 기대하듯 천재 디자이너가 그려낸 화려한 발명품을 전시하는 영화가 아니라 '인간' 코코 샤넬의 삶을 반추하는데 중심이 실려있는 영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영화는 그녀의 삶을 참 의미없게 그리고 있다. 심하게 말하자면 성공에 대한 욕심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지만, 어쨋거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거친 소녀의 원조교제 성공담 정도로 치부해도 무리가 없을 듯 하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녀의 디자인 스타일은 허리가 뭉개질 정도로 아파도 코르셋으로 몸통을 조르고, 목이 떨어져나갈 것처럼 무거워도 에드벌룬 보다 더 큰 모자를 쓰고, 발목이 부서질 것 같아도 높은 힐을 신어야만 품위라고 생각하는 허위의식에 가득찬 당대의 귀족 사회에 드러난 여성 패션 스타일을 비웃고, 좀더 편하고 수수하게 자신의 몸에 맞는 스타일을 확립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이런 스타일은 철학으로 발전하지 못한다. 갑갑한 코르셋에 갇혀있는 여성의 몸을 해방시킨다는 혁명적인 개념도 겉치레로 가득찬 멋없는 사회를 바꿔보겠다는 진보적인 생각 따위는 없다. '내가 편하면 돼. 뭐하러 불편하게 저런 옷을 입어?' 따위의 철학이라기 보다 본인이 생각하는 불편함을 늘어놓고 그에 맞는 옷을 재단해 입었던 코코. 그런 그녀의 스타일을 칭찬하는 주변 사람들 덕분에 어찌보면 다른 것이 하고 싶었는데 할 수 없이 마지막 수단으로 디자이너가 되었다는 식의 영화적 전개는 그녀의 삶을 왜곡시키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 정도다.

이 영화 속의 코코 샤넬은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곱씹으며 성공을 다짐하는 다부진 모습도, 갑갑한 귀족 스타일을 탈피하고자하는 혁명적인 디자이너로서의 면모도 없다. 다만 그런 것처럼 보이기 위해 고아원 장면을 넣고, 클럽에서 가수하는 모습을 넣고, 갑갑한 귀족들 속에 섞여 있어 그들을 조롱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장면들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시퀀스들은 코코 샤넬이라는 여인의 철학과 삶에 흡수되지 못하고 그저 그런 적이 있었다라는 것을 나열만 할 뿐이다. 오히려 클럽에서 가수를 하던 시절의 모습이 더 행복했던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니 영화 마지막 패션쇼 후 사람들이 그녀에게 박수갈채를 보내고 그녀가 힘들었던 과거의 삶을 되돌아 보는 장면에서는 '저 여인의 삶이 저런 표정으로 인생을 되돌아 볼 정도로 그렇게 극적이기나 했나'라는 물음표가 떠오르게 된다.

인생의 굴곡이 많고 극적인 삶을 살았던 세기의 디자이너 인간 코코 샤넬. 그리고 그녀의 삶을 단선적이고 평면적으로 지루하게 그려낸 영화 코코 샤넬. 이만큼 사람의 인생을 의미없게 그려내기도 쉬운일은 아닐것 같다.

마지막으로 영화가 묘사하는 코코 샤넬의 성공방법을 알아 보자!

I.          부자를 잡아라. 당신이 아무리 재능이 있더라도 물주가 없다면 성공은 꿈도 꾸지 마라.

II.        부자들과 섞여 있더라도 자존심은 버리지 마라, 그러나 당신의 물주인만큼 그의 자존심이 더 중요하기에 때로는 복종도 해야 한다. 자존심만이 능사는 아니다.

III.       매사에 노력할 필요는 없다. 좋아하는 것을 확실히 알지 못하더라도, 언젠가 기회가 오면 성공할 수 있다.

IV.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매진해 혼을 불태울 필요는 없다. 불합리한 것을 어느정도만 인지해도 성공의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 것이다.

V.       재능이 있다면 주변에서 먼저 알아준다. 느긋하게 그 때를 기다려라. 그 재능은 그저 취미 생활 정도로만 유지해 나가도 충분하다.

제목: 코코 샤넬 (Coco avant Channel, 2009)
감독: 앤 폰테인
배우: 오드리 토투, 브누와 뽀엘부르드, 알렉산드로 니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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