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MBC에서 하는 '나는 가수다'를 보는 재미가 쏠솔하다. 특히 첫회의 감동은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정말 노래를 잘해서인 점도 있지만, 뭐랄까 향수를 자극하는 힘이 컸다. 90년대 중반 대학에 다닐 때 친구들과 함께 들었던 노래들과 가수들이었으니까. 라이브를 하는 가수들이 많이 없었던 시절 이소라의 프로포즈가 지니는 힘과 그 방송이 끝난후 친구들과 한잔하면서 풀어놓았던 썰들이 머리속에 다시 떠올랐다. '와 정말 멋있다' 정도의 대화들이었지만, 나이가 들었는지 별생각없이 친구들과 어울렸던 그 시절이 가끔 그립기는 하다.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와 김건모의 잠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 박정현의 꿈에를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오르더라. 잠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를 편곡하지 않고 김건모가 다른 가수들처럼 담백하게 불렀다면 어쩌면 진짜 울어버렸을지도... 80년대, 90년대 영화들을 보면 별 재미가 없음에도 그 영화속에 담겨져 있는 당시의 풍경과 당시엔 세련되었지만 지금 보면 촌스러운 여자들의 화장법, 행인의 패션들을 보기만 해도 왠지 그 영화가 재미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한살한살 지날수록 과거가 더 멋져 보인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 시절 정말 힘들었는데도 말이다. 우리 아이도 커가면서 2010년, 20년대를 나처럼 기억할까?

[어떤 고마우신 분이 올려주신 박정현 - 꿈에 현장 버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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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그녀의 남자친구 로져, 그녀의 옛 룸메이트 베티. 여행을 가는 도중 로져가 베티에게 관심을 갖자 버지니아는 기차에서 뛰어내려 수도원으로 향하는데, 하필 이 수도원에 500년간 잠들어있던 눈먼 좀비들이 깨어나고 버지니아를 잡아먹는다. (정확히는 그녀의 피를 빨아먹는다) 로져와 베티는 그녀를 찾아나서고, 둘 모두 좀비 기사단에 쫓기게 되고 마지막에 베티가 좀비 기사단에게서 도망치며 기차에 올라타는데, 이 기차에 좀비들이 올라타서 수도원 지역 뿐만 아니라 전세계로 좀비가 뻗어나간다는 묵시록적인 결말을 맞는다.

죠지 로메로가 1968년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발표한 이후에 전세계에서 좀비 영화들이 양산되기 시작함에 따라 스페인에서도 자국의 신화를 이용해서 좀비시리즈를 만드데 1971년에 발표된 아만도 데 오소리오 감독의  4편의 블라인드 데드 시리즈가 그것이다.  국내에는 무덤의 사자들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눈먼 좀비 기사단의 탄생 배경은 이렇다. 중세시대에 악마주의를 신봉하는 기사단이 있었다. 이 기사단은 마을의 젊은 여자를 잡아다가 여자들의 피를 마시는 의식을 통해 영생을 누리고자 했다. 분노한 마을 사람들은 기사단을 불태워 죽였는데 행여 이들이 죽음의 길에서 현세로 넘어오는 길을 찾을까봐 눈을 지져버렸다. 그래서 눈먼 좀비로 되살아났다.

이 시리즈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의 좀비들과 같이 좀비에게 물리면 좀비가 된다는 전염병의 특징을 차용하고 있지만 (매 편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다), 오소리오의 좀비들은 눈이 멀었고, 심장소리를 통해서 희생자를 쫓는다는 차이점을 갖는다. 또한 그들은 죽음의 이유가 된 불을 무서워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 불은 피해자들이 좀비기사단으로부터 도망치는 방편이 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말을 타고 달린다. 세트가 아닌 야외 고성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좀비의 슬로우 모션은 별다른 특수효과가 없음에도 굉장한 박력을 느끼게 하고, 이것이 이 영화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요소이다.

무덤의 사자들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tombs of the blind dead는 오래전 영화라 세월의 촌스러움은 있지만, 좀비 영화팬이라면 한번쯤 감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하다.

덧붙여.
-. 이 시리즈의 2편을 아주 어린 시절 (10살 정도로 기억하는데) '악령의 소생'이라는 제목의 삐짜 비디오로 감상한 적이 있다. 시작부터 여성의 사지를 묶어놓고 가슴에 칼을 꽂아넣고 피를 마시는 장면에서부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2편은 좀비에게 쫓겨 한정된 공간에 갇힌 인간들이 저마다의 이기심으로 서로를 배반하고 탈출하는 등의 조금은 더 좀비 영화의 공식에 맞춰져 있다.

-. 미국에서 무덤의 사자들은 혹성의 복수 (Revenge from planet of the ape)라는 제목의 버젼으로 공개가 되었는데, 이는 68년 발표된 혹성탈출 (Planet of the apes)의 성공에 묻어가려는 속셈이었다. 좀비와 혹성탈출이라는 상관관계 없는 두 영화의 개연성을 만들기 위해 이 버젼에는 프롤로그가 삽입되어 있다고 한다. 3000년전 고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던 유인원 문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행성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인간과 전쟁을 벌인다. 전쟁 결과 인간이 승리하고, 인간들은 포로가 된 유인원들의 눈을 뽑아 꼬챙이에 꽂는 등 잔인한 방법으로 그들을 학살한다. 유인원의 우두머리는 인간들의 잔혹함에 복수하기 위해 죽음으로부터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맹세를 하고 죽는데, 이것이 그들이 눈먼 좀비로 되살아난 이유이다. 블루언더그라운드 버젼의 dvd에 실려있는 프롤로그를 첨부한다.



제목: 무덤의 사자들 (Tombs of the blind dead, 1971)
감독: 아만도 데 오소리오
배우: 론 플레밍, 세자르 부르너, 마리아 엘레나 아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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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고립된 섬 혹은 가부장적인 시스템에서 착취당하는 여인의 삶을 주변인 (도시인)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원시적으로 보이는 그곳과 화려한 도시가 별반 다를 바 없음을, 그러니까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똑같으니 세상이 좀 더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나의 주체성을 찾고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단호히 내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의 영화다.

[섬을 유지하는 시스템]
이 섬에는 어디에나 있는 왕따 메커니즘이 최대한으로 작용하고 있다. 주변인에 대한 묘사가 디테일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섬의 질서를 담당하고 있는 대장이라고 표현할 만한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복남의 시어머니의 눈 밖에 날까봐, 그러니까 또다른 착취 혹은 차별의 대상이 될까봐 가해자의 편에 선다. 왕따가 되기 보다는 왕따를 시키는 것이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손쉬운 방법이기에 그들은 복남의 편에 서지 않는다. 대개의 왕따 시스템은 그런식으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한번 착취자의 시스템에 가담해 버리면 반대편에 손을 내밀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는 법이다. 양심이라는 것도 점점 엷어지는 것이고. 또한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벌어지는 학대의 현장이기에 아마도 복남의 처지에 침묵하는 그들도 과거에는 남자들 혹은 시어머니라는 질서로 부터 착취를 당했을거라는 것도 쉬이 짐작해볼 수 있다. 어쨋거나 '섬에는 남자가 있어야 한다'는 말 한마디에 모두들 꼼짝도 못하니까. 따라서 착취를 당해본 자이기에 착취 당한자의 편에 서기 보다는 착취자의 편에 서는 길을 택한다.


[해원과 복남의 어이없는 대결]
해원과 복남이 대결하는 종반부는 다들 지적하듯 생뚱맞게 느껴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기도 하는 것이, 해원은 섬의 대다수 주민들이 그러했듯이 방관자 역할이고, 복남은 피착취자 역할이었다. 복남은 본인의 복수를 행하는 것이기에 섬 전체를 둘러싼 시스템화 되어 있는 폭력을 깨부술 의지가 발현될 개연성이 있었다면, 방관자는 오히려 방관자이기에 그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동기부여가 적을 수도 있다. 어쩌면 더 어려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해원이라는 방관자가 폭력에 대한 방관자가 아닌 주체로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친구를 죽이고 나서야 깨달을 만큼) 더 큰 고난을 필요로 했는지도 모르겠다.


[착취 당하는 자들의 홀로서기]
동네 사람들의 무관심 혹은 남자 없음에 대한 두려움, 방관에 의해서 복남의 인생은 유린되고 착취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그녀는 그다지 무기력하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시동생에 의한 성적 착취에 대해 체념에 가까운 감정을 품고 살아가지만, 이성적으로는 그녀가 자신이 그어놓은 임계점 (딸아이에 대한 착취)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단호하게 행동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딸아이에 대한 묘사였다.  집단 강간의 잉태로 태어난 딸아이, 의붓아버지는 아이를 성적으로 착취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아이는 의붓아버지를 사랑한다. 그러나 엄마를 배신할 것 같았던 여자 아이는 (그녀가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싶어함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아이란 대개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한 존재가 아니던가) 자신의 욕망보다는 매일 성적으로 갈취당하고 폭력으로 학대당하는 엄마를 탈출 시켜야 한다는 여성으로서의 이성적인 연대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섬 사람들의 착취에 폭발한 복남의 대학살에 대한 결과물로 도시 여인은 폭력에 지지않고 홀로서는 방법을 터득한다. 공권력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현실에서 유린당하는 자들의 홀로서기는 굉장히 중요하다. 밟힌 지렁이가 꿈틀해야 밟은 사람도 거기 지렁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에필로그 격으로 실린 경찰서 장면에서 살인자를 지목한 뒤 피의자가 자신을 구타하려하자 재빨리 볼펜을 들고 볼펜심을 누르는 여인의 손에서 복남의 섬 몰살 풍경만큼이나 강인함과 통렬함을 느끼게 한다.

[복수의 대리자가 아닌 주체자]
악마를 보았다류의 여타 복수 영화와 차이를 보이는 것은 수십년 동안 학대를 받은 그 자신이 복수의 주체라는 것이다. 그녀는 살해당한 여인네의 힘있는 남자친구라거나 아버지가 아니라 그녀 자신의 복수를 자신이 행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데, 복수를 행하는 주체가 대리자일 경우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보다는 저들의 복수가 윤리적으로 옳은가라는 또다른 물음이 끼어들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의 억울함이 그 당사자라고 해서 살인으로 해결해도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김복남 살인사건은 좀 더 우직하고, 좀 더 강한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덧붙여.
-. 서영희가 아이를 잃고 오열하는 장면이나 그 분노를 가슴으로 끓여내면서 사람들 묻을 땅을 만들려고 감자를 캐는 장면의 서늘함과 찌는 태양만큼이나 이글이글 불타는 긴장감은 정말 대단했던 것 같다.

-. 해외에서 김복남 블루레이 출시소식이 들려오는데 국내 영화를 해외에서 주문해야 하는 현실이 참 안타깝다. 귀찮기도 하고.

제목: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Bedevilled, 2010)
감독: 장철수
배우: 서영희, 지성원, 백수련, 박정학, 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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