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스 1닥터스 1 - 10점
에릭 시걸 지음, 석은영 외 옮김/김영사
중학교 3학년쯤이었나. 그 때 라디오를 통해서 도서 광고를 엄청 해댔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던 것이 '토머스 해리스가 선사하는 범죄의 공포-양들의 침묵~ 어쩌구'하는 것과 '퓰리쳐 상에 빛나는 어쩌구 저쩌구 앵무새 죽이기'였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 중에 한편인 '에릭시걸이 선사하는 하버드 의대생들의 사랑과 어쩌구'하던 '닥터스'다.

어릴적부터 꿈이 의사였던 나에게 '의사가 꼭 되고 말거야!'라는 결연한 의지를 심어주었던 기특한 녀석이었지만, 아무튼 현재 나는 의사가 되지 않았으니 이 책을 떠올릴때마다 한참 잊고 있던 그때의 열정과 순수성이 떠올라 가끔 왈칵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의사들을 소재로 다룬 이야기는 많이 있었지만, 닥터스가 그 시절 나에게 어필한 가장 큰 요소는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정말 치열하게 공부했다는 점이다. 매일 밤을 세우며 공부를 하고 새벽 공기의 외로움 속에 떠오르는 성욕을 잠재우며 눈에 핏줄을 세우며 공부하는 모습은 뭐랄까 나말고도 이런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것을 소설이지만, 현실적으로 와닿게 해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얘기들을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에피소드와 미국의 굵직굵직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버무려서 진지하지만 유머를 잃지 않고 전개해 간다.

흑인이자 유태인 부모를 둔 베넷 렌스먼을 통해 보여준 차별과 편견의 의미, 안락사의 범죄여부를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을 벌였던 세스 라자러스, 전쟁과 의사와 윤리와 돈의 미묘한 관계를 보여준 행크 드와이어,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리얼한 사랑의 줄타기를 보여줬던 너무나 매력적인 캐릭터, 주인공 바니 리빙스턴과 로라 카스텔라노 등등 결코 지루할 틈을 주지 않고 많은 화두를 던져주고 빠지는 닥터스는 두고두고 읽어봐야할 소설이다.

밑줄.
소꼽친구로 시작하여 불우한 가족사의 한켠에서 허덕이던 사춘기 때에는 상담가로, 함께 공부하며 꿈을 키워가던 청년으로, 서로의 사랑에 대한 조언가로 성장한 그들이 서로 진정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키스를 하던 바니와 로라의 사랑이 결실을 맺던 '장'의 이 문장은 정말 극적이다. 
그리고 그 날 밤으로 두 사람의 플라토닉한 우정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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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프로그래머인 커비는 영화수집광인 밸린저의 요청으로 거금을 받고 한스 백코빅이 감독한 '세상의 절대적인 종말 (Le Fin Absolute Du Monde)'이라는 영화를 찾아나선다. 시체스 영화제에서 단 한번 상영되었을 때 관객들이 서로 죽이는 유혈사태가 발생하여 스페인 정부가 폐기처분 했다고 알려진 작품. 그 후로도 이 작품을 접한 평론가는 폐인이 됐고, 촬영감독은 눈이 멀었으며 감독도 끝내 자살을 했다는 영화를 둘러싼 소문만 무성하고 실제 본 사람은 거의 없는 이 작품에 한걸음씩 다가갈수록 커비는 알 수없는 붉은 원(담배자국-Cigarette burns film reel의 교체 시간을 알리기 위해 reel의 오른쪽 상단 끝에 표시하는 동그란 원 모양을 의미)의 환상을 보게 되고 점점 피칠갑의 영화속으로 빠져든다.

존 카펜터가 감독한 '마스터즈 오브 호러 시리즈'의 여덟번째 에피소드인 'Cigarette burns (담배자국)'은 영화의 악의적인 영향력과 개인의 경험치에 의존한 영화 해석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인간의 호기심과 컴플렉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관객은 어두운 극장에 앉아서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수많은 상상을 한다. 극단적인 감정에 치우치길 원하는 관객들은 도에 지나친 장면들을 원하기도 하지만 대개의 영화들은 임계점을 넘어서진 않는다. 따라서 대개의 영화는 '안전'하다. 하지만 '세상의 절대적인 종말'이라는 영화는 그 임계점을 넘어서 인간의 신경을 갉아먹고 일순간에 삶을 파괴하는 힘이 있다. 한스 백코빅 감독의 말을 인용하자면 '영화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감독이 어떤 악의적인 가치관을 심으려고 영화에 그런 의미들을 곳곳에 숨겨놓았다면 관객은 아마도 이를 철저히 경계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는 개개인은 모두 각자의 인생과 경험에 비추어 영화를 보게 된다. 그래서 어떤 영화들은 관객의 나이에 따라서 다르게 읽혀지기도 하고, 지식 혹은 상황에 따라서도 색다른 영화로 변모하기도 한다. 영화에서 담배자국은 현실과 영화를 연결하는 통로, 그러니까 현실과 환상을 이어주는 통로 역할을 한다. 그래서 Cigarette burns는 보고 있는 관객에게 영화 속에 자신의 경험을 투영하여 스스로의 영화를 만들도록 한다.

밸린저는 마지막에 '세상의 절대적인 종말'은 본편이 아니라 예고편이라고 말한다. 바로 영화를 본 사람들의 잠자고 있던 어두운 과거와 컴플렉스를 현실에 펼쳐 놓기 위한 방아쇠 역할을 하는 예고편이다. 당연한 진리이지만, 영화는 언제나 인간의 상상력에서 자라남으로 인간 그 자체 보다 더 잔혹 할 수 없고 인간을 초월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 자체가 영화가 된다는 영화의 설정이 대단히 매력적이다
.

커비는 자신의 여자친구에 대한 죄책감이, 아버지는 죽은 딸에 대한 비정상적인 사랑이, 자극적인 희귀영화 수집가인 밸린저는 그 자신의 신체가 영화가 된다. 마지막에 밸린저가 기어이 자신의 창자를 꺼집어내고 영사기에 걸어 진정한 '고어'영화를 만드는 부분에 이르면 전율이 일어날 정도다
. 마스터즈 오브 호러의 이 여덟번째 에피소드는 masters of horror 시리즈 중에 단연 최고다.

제목: 마스터즈 오브 호러 Ep.8 - 담배자국 (Cigarette burns, 2005)
감독: 존 카펜터

배우: 노만 리더스, 우도 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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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긋지긋한 일상을 벗어나고자 오래전부터 계획해 온 휴가. 고심끝에 스킨스쿠버를 하려고 떠났건만 스쿠버를 하고 약속장소에 돌아와 보니 기다려야할 배는 보이지 않고 망망대해만 눈앞에 펼쳐져 있다. 바다의 색깔은 푸르다 못해 끝간데 알 수 없는 깊이로 인해 검게 보이고 그 아래 어떤 생물이 살고 있는지는 짐작도 할 수 없다. 해파리에게 물리고 상어는 주변을 멤돌고 사람냄새가 나는 물건 따위는 조난된 부부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밤은 찾아오고 바닷물은 차기만 하고 탈수된 몸으로는 더이상 가만히 떠있는 것 조차 힘들다. 남편은 죽고 그 남편을 떠받치고 있을 힘도 없어 그를 상어 밥으로 내주고 나서 내가 할 수 있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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