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견은 인종차별주의자에 의해 흑인만을 공격하도록 교육된 하얀개를 교화시켜 인종차별의 골을 해소하고자하는 노력을 담은 영화지만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절망적인 내용을 다루는 영화다.


이 영화는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흑인을 공격하는 개를 연쇄살인범 등의 또다른 사회적 괴물과 등치해서 보아도 이야기는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트라우마 혹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범죄자들을 교화시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좀 더 확대해보면 인성이 미쳐 자리잡기도 전에 경쟁과 성장만을 강요받은 결과로 만들어진 양심이 없는 인간에게 인성을 주입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기에 그만큼 사회에서 제대로 된 인간으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인간성을 절대 배제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트라우마라는 것은, 다시 말해 공포로 형성된 자기보호 메커니즘을 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일 경쟁과 공포를 부추기는 사회속에 살고 있고, 그런 만큼 선진국형 범죄라고 불리우는 잔혹한 범죄는 점점 증가하고 있다. 현시점에서 보는 마견은 인종차별이라는 그 의미 이상로 보여진다. 마견을 길러낸 사람이 평범한 인물이라는 것까지 더해서 말이다.

덧붙여.
-. 의외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 차별을 해소하고자 노력하는 영화들이 꾸준히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차별이라는 것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반증이겠다. 현실에서 해소될 수 있는 것이 불가능할 것처럼 여겨져 차별을 다룬 영화들은 일종의 신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인종차별이라는 것은 미국 역사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무엇이든 시작이 중요하다. 성장만을 강요하는 이 사회가 참으로 무섭게 느껴지는 것도 그 이후의 돌이킬 수 없는 미래가 더 참혹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 마견은 군더더기 없고 단순하고 명료한 영화다. 지리하도록 늘어지는 개의 교화 장면은 차별의 골이 그만큼 깊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여 우직한 영화에 힘을 실어준다. 또한 두말할 필요 없이 개의 연기가 명불허전이다. 진정으로 보는 이에게 공포를 느끼게 한다. 단순하기에 전달되는 공포 또한 일품. 거리를 어슬렁 거리는 개와 원경으로 흑인 아이를 동시에 보여주는 장면은 찌릿찌릿하다.

제목: 마견 (White dog, 1982)
감독: 사무엘 풀러
배우: 크리스 맥니콜, 폴 윈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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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자 어쌔신은 디워 이후로 참으로 간만에 만나는 엉망진창 영화였다. 웰메이드를 표방했지만(풋) 엄청나게 못만든 탓에 오히려 B급 영화의 감수성을 느끼게 해줬던 디워는 못만든만큼 오히려 재미가 올라가는 영화였다. 어설프게 못만들면 그냥 재미없는 영화로 끝나겠지만, 완전히 엉망이면 즐길 수 있는 구석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닌자 어쌔신은 닌자의 액션을 보여주기 위해 다른 것은 과감히 포기했다기 보다는 결과적으로 다른 것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진 영화다. 이 영화에 개연성 따위는 없다. 당위성도 없다. 있다하더라도 얕다. 상대에 대한 복수 혹은 악감정은 서서히 구축되어 응축된후 폭발한다기 보다는 액션 영화에서 악인을 만들어야 겠으니 이런 상황을 하나쯤 넣어줘야지하고 어설프게 만들어낸다. 닌자의 존재를 알게된 요원과 그들을 감시하는 정부 집단도 있어야겠으니 등장시킨다. 주인공에게 위기도 있어야 겠으니 한번 잡혀준다. 모든 상황이 이런 식이다. 닌자 어쌔신 속에는 많은 상황이 등장하지만 그 상황은 파편화되어 나열되어 있고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 영화 속에는 디테일도 없다. 컴퓨터 몇대랑 철문 하나 가져다 놓은 안전가옥의 풍경을 보면 헛웃음이 나온다. 이렇게 닌자 어쌔신은 불필요한 것들은 절대적으로 생략하여 보는 이에게 스토리의 합리성을 기대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을 영화 전체를 걸쳐 항변하는 영화이기에 단순하고 우직하다. 이런 영화이기에 닌자 어쌔신이 품는 오리엔탈리즘이 어떻고 얘기하는 것은 유치원생이 그려놓은 그림일기에서 예술을 찾으려고 하는 것만큼이나 무모하고 의미없는 짓이다.

액션 또한 비슷하다. 한정된 공간. 어둠속에 무언가 절대적인 힘을 가진 존재가 있고, 인물들은 두려움에 떤다. 사방에서 무언가 날아들고 인물들의 사지가 하나둘씩 잘려 나간다. 금새 피바다가 된다. 이치 더 킬러를 연상시키는 오프닝은 정확히 이 영화가 정교한 합을 구사하는 액션 영화가 아니라 일본애니메이션의 피칠갑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영화라고 알려준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대로 성공적으로 보인다. 적어도 피는 한바가지 흘려주니까. (오~~!) 이런 B무비스러운 영화의 시작은 끝까지 일관되게 B무비스럽게 나간다. 낄낄거리며 조롱하고 즐겁게 웃어줄 수 있다. 주인공은 악당을 쳐부수고 행복하게 살았어요라는 결말로 끝날 테니까. 한가지 안타까운 점은 이 영화의 액션이 기본적으로 어둠 속에서 펼쳐지는 것을 근간으로 하고 있어 빠른 동작으로 치고 달리는 장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둠과 빛을 적절히 활용했으면 멋있었을텐데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것과는 별개로 액션의 긴장감은 빵점이다. 도무지 쟤가 왜 저렇게 애를 쓰고 있는건지 이입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느긋하게 팝콘을 던지며 감상할 수 있다.

닌자 어쌔신은 감독이 의도했다고는 생각치 않지만, 어쨋든 정말 못만든 B급영화다.  너무 못만들어서 웰메이드 영화를 비웃는 것처럼 보여 즐거워지는 영화이기도 하다. 무엇이든 극한으로 치달으면 의도치 않게 미덕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디워 이후 다시 한번 일깨워준 영화이기도 하고. 웃으면서 극장을 나서게 만들 수 있는 영화다.

덧붙여.
-. 비의 몸매는 헉할 정도로 멋있었지만, 스크린에서 만나는 그의 얼굴은 참 없어보였다.

-. 스크린에서 만나는 사지절단 액션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더 즐거웠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오프닝과 비가 첫번째 살인을 하는 화장실 시퀀스는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 세탁소 주인이 보는 TV에서 무슨 프로인지 모르겠으나 한국 TV 사극이 나온다. 헐리웃 영화에서 전설의 고향 스러운 영상을 보게 되니 상당히 반갑다. 비가 나오는 영화에서 앞으로 이런 식으로 한국을 만나게될 상황들이 늘어날테니 반가운 마음이.

-. 비가 '미카, 미카'를 연발하는 장면에서 마눌님과 함께 '빵' 터졌다. 너무 웃겨서 밖으로 나가서 웃다가 다시 들어올까 생각했을 정도. 아~ 이건 비의 잘못은 아니다. 그 대사는 누가 했어도 빵 터졌을 거라고 생각.

-. 엉망이라 즐겁기는 했지만, 매트릭스나 브이 포 벤데타 같은 영화들을 만들었던 제임스 맥테이그 감독이 어떻게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지 한편으로 신기하기도 했다.

제목: 닌자 어쌔신
감독: 제임스 맥테이그
배우: 비, 릭윤, 나오미 해리스, 쇼 코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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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전 한 잔전쟁 전 한 잔 - 10점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황금가지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의 첫번째 이야기인 '전쟁 전 한잔'은 정치와 범죄 조직의 커넥션에 아동 성폭력이라는 키워드를 하나 더 끼워넣는다. 상원 의원의 의뢰로 중요한 자료를 갖고 사라진 흑인 여인을 쫓는다. 여인을 찾아내지만 갱단의 총에 맞아 살해되고, 켄지는 그 과정에서 갱 한명의 발목을 날려버린다. 여인에게 건네받은 사진엔 정치인과 갱단의 두목이 함께 찍혀 있다. 사건의 중심에 다가갈수록 구린내는 더해가고 켄지와 제나로는 갱단으로부터는 복수의 대상이 된다.

켄지와 제나로의 첫번째 이야기인만큼 켄지와 제나로의 개인사가 더욱 자세히 묘사된다. 소방관 출신의 시의원으로 외부에서는 영웅으로 대접받는 마초 아버지이지만, 가정내에서는 어린 켄지를 매일 두들겨 패고 다리미로 지지기까지 하는 폭군이었던 아버지의 그늘에서 내내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켄지와 술에 취해 의처증으로 매번 제나로를 두들겨 패는 남편 필립의 이야기는 주인공들의 폭력에 대한 증오와 잡배에 대한 분노의 시발점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따라서 이들이 폭력적인 무뢰한들을 대하는 모습에는 자비심이 없지만, 세상이 깨끗하길 바라는 그들이기에 고뇌는 쌓여간다. 누구든 똑같이 처우를 받기를 바라지만, 그들 자신이 차별을 행하는 인물이기에 딜레마도 늘어간다. 그리고 자신들이 행하는 차별은 돈과 권력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기에 그들을 더욱 초라하게 만든다. 다르게 보면 인간적이게 만들고.

전쟁 전 한잔에는 소시민이 바꿀 수 없는 정치 사회 권력에 대한 비애감이 숨어있다.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정치의 이면에는 정치인의 이익을 위한 정책이라는 공공성 보다는 개인적인 이기심이 숨어있고, 자신의 안전과 권력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어린 아들조차 성의 노예로 팔아버리는 비정하다는 말도 아까운 아버지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런 삶을 견디고 살아난 아들은 마음이 없는 살인광이 되어 버리는 폭력의 되물림도 보여준다.

이런 지옥같은 사건을 나열하면서도 데니스 루헤인 소설이 매력적인 것은 그가 성인군자인 체하며 가르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통 정도의 지능만 있어도, 아니 대다수의 사람들은 유치원만 나와도 뭐가 옳고 그른지 알수 있다. 그러나 알고 있다는 것과 내가 그 아는 것을 모두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무엇이든 차별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특정한 상황에 처했을 때 알고 있는 것데로 행동하지 않는다. 루헤인 소설의 주인공들은 이와 같이 부조리하지만, 그렇기에 인간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정의를 알고 정의를 위해 고군분투 죽을 고생을 하지만 그 결말은 결코 도덕적이지도 합당하지도 않고, 속이 시원하지도 않다. 그렇기에 더욱 속깊은 물음을 던져 준다. 아~ 이 시리즈 너무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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