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도에 하이텔 애니동에서 생생CD라는 것을 팔았다. 애니메이션 음악의 mp2, mp3 파일과 오프닝/엔딩 동영상을 모아 놓은 세장 짜리의 CD였는데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접한 mp3였다. 그 전에는 뭐 그런게 있었는지 몰랐다. CD 한장에 어찌나 많은 노래들이 들어있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고, 친구녀석이랑 방구석에서 하루종일 CD를 돌려놓고 참치캔에 소주 먹으면서 하루하루를 떠밀려 보내던 시절이었다. 그 중에서도 유독 좋아하는 노래들이 있어서 지금까지도 몇번이고 듣고 있는 노래들. 생각해보니 나는 그 노래를 어떤 얼굴을 한 가수가 어떤 모습으로 부르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음악을 들으면 오래된 애니메이션에 대한 혹은 그 사춘기 시절의 가슴이 아리아리한 감정이 떠오르는 정도. 수백번 들었던 이 노래들의 live 버젼을 듣고 싶어 유튜브를 뒤지니 역시 유튜브 인지라 왠만한건 다 있더라. 아무리 들어도 정말 명곡들이다.

변덕쟁이 오렌지로드
오렌지로드는 '초능력'을 가진 소년의 연애담이지만, 얼핏 떠올려 보면 쿄스케가 초능력을 가지고 있었는지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저 아주 현실적인 연애담인것처럼 기억된다. 우유부단한 쿄스케와 마도카, 히카루의 삼각관계에 너무 공감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마도카가 역시 너무나 좋지만, 히카루를 한번에 내쳐버리기에는 마음이 아프달까. 그런데 역시 마도카가 으뜸인지라 오렌지로드의 ost를 듣고 있으면 마도카가 혼자 방구석에 앉아있다거나 쿨하게 거리를 걷고 있는 모습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어쨋거나 오렌지로드의 ost는 저 하늘을 안고서 (あの空を抱きしめて)나 
슬픈 마음이 불타고 있어 (悲しいハートは燃えている)도 너무나 좋지만, 역시 최고는 와
다 카나코 (和田加奈子)의 여름의 신기루 (夏のミラージュ)다. 전주만 들어도 마구마구 가슴이 정화되는 느낌.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국내 오프닝이었던 '나디아 너의 눈에는 희망찬~'도 좋지만, 역시 원래 오프닝인
모리카와 미호 (森川美穂)의 blue water가 최고. 배바지스러운 복고풍 의상과 촌티나지만 왠지 한없이 명랑하고 즐거워 보이는 율동이 쥑인다. 게다가 이 아가씨의 가창력은 정말이지 속이 다 시원하다.


시티헌터
아버지가 어렸을 때 일본에 다녀오시면 TV프로그램을 녹화한 비디오테입을 가지고 오시곤 했다. 그 때 녹화되어있던 애니가 바로 시티헌터. 오프닝이었던 코히루이마키 카호루 (小比類巻かほる)의 사랑이여 사라지지 말아요 (愛よ消えないで~)가 어찌나 귀에 착착 감기던지. 코히루이마키 카호루는 지금도 활동을 꽤 하고 있는지 유튜브에 최근의 라이브도 있다. 음악을 즐기는 모습이 아주 좋아보인다. 시티헌터도 역시 TM network가 부른 수많은 명곡들이 있지만, 그래도 한곡만 꼽으라면 단연코 요놈이다.


마법기사 레이어스
마법기사 레이어스의 애니를 제대로 감상한 적은 없지만, 이 노래만은 귀가 닳도록 들었다. 본래 좀 떽떽거리고 쨍쨍거리는 여성 보컬을 좋아하는데 타무라 나오미 (田村直美)의 목소리가 딱. 제목은 양보할 수 없는 소원 (譲れない願い).


기동전사건담 08MS소대
애니메이션 음악의 최고봉을 꼽으라면 건담시리즈다. Rhythm emotion, just communication, white reflex 등을 부른 two-mix의 모든 노래가 좋고 요네쿠라 치히로 (米倉千尋)가 부른 영원의 문 (永遠の扉)도 good이지만, 역시 건담하면 이 노래 폭풍속에서 빛나줘 (嵐の中で輝いて)가 짱이다. live를 보니 저 현장에서 나도 손을 머리위로 쳐들고 목이 터져라 따라 부르고 싶은 심정.


천공의 에스카플로네
이등병 시절에 천공의 에스카플로네를 TV에서 방영한 적이 있다. 너무 보고 싶었지만, 밥이 안되니 TV로 눈을 돌릴 수가 없어서 속이 바짝바짝 마른 기억이 난다. 국내 오프닝은 일본 오프닝을 그대로 개사만 해서 불렀던지라 그맛도 꽤 신선했던 것 같다. 역시라는 말을 몇번이나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역시 사카모토 마야 (坂本真綾,)의 청량한 음성이 돋보이는 이 노래 약속은 필요없어 (約束はいらない)가 좋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에반게리온에 대해 말해 무엇하랴. 국내에 출시된 비디오테입을 우연히 빌려보았다가 B자 비디오로 전편을 구해서 테입이 늘어질때까지 보고 또 보았던 애니메이션. 나에게 fly me to the moon이란 노래를 처음 알려준 (레이가 무중력 상태에서 유영하듯 거꾸로 빙글빙글 돌아가는) 엔딩의 정서적 충격도 대단했지만, 오프닝의 나카가와 쇼코 (中川翔子)의 잔혹 천사의 테제도 만만치 않았다. (원곡은 타카하시 요코가 불렀다고 합니다. NIZU님 감사.)잔혹 천사는 머고, 테제는 또 머래라고 생각했지만, 왠지 가슴이 마구마구 두근거리는 느낌. 폭주와 열혈의 중간 단계에서 한없이 고독해지는 인간의 숙명이랄까.


이 외에도 요즘에는 천원돌파 그렌라간도 종종 듣고, 페니실린이 부른 멋지다 마사루의 오프닝 romance도 좋고, scoobie do가 부른 건그레이브의 엔딩 검붉은색이 타오를 때 (茜色が燃える時)도 강추고, 드럼소리에 가슴이 터질듯한 X-japan이 부른 클램프X도 좋고, garnet crow가 부른 코난의 오프닝 mysterious eyes도 좋고, 뭐 좋은 노래야 수없이 많지만, 그래도 위의 곡들은 다시 한번 생각하지만, 추억이 새겨진 개인적인 최고의 명곡이다.

덧붙여.
-. 모아놓고 보고 싶을 때마다 볼려고 한 포스팅임.
-. 슬레이어즈의 엔딩곡인 somewhere도 live가 참 보고 싶었는데 영상이 없다. two-mix의 just communication도 없고. 아쉽다 아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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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수씨의 '연옥님이 보고계셔'를 술자리에서 친구놈이 추천해줘서 종결된 줄 알고 읽기 시작했는데 아놔, 아직 연재중이시더라. 본래 다음편이 나오는 것을 참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성격인지라 끝나지 않은 이야기는 어지간해서는 손을 안대는 편인데 어쨋든 낚였다면 낚였다고 하겠다.

연옥님이 보고계셔는 참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하는 카툰인데 매화마다 사람의 심장을 후벼파는 찡함이 묻어있다. 왜 사는 걸까, 이다지도 힘이 부치는데 왜 사는 걸까, 왜 세상은 나를 제외하고 지들끼리 돌아가는걸까, 그것도 잘도 돌아가는 걸까. 사춘기때부터 스스로에게 물어왔던 '왜 사는 걸까'라는 물음의 깊이는 나이를 먹을 수록 점점 얕아지거나 희석될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내가 경험해온 세월의 흔적만큼 사는 것에 대한 회의감과 우울함은 늘어가는 것만 같다. 다만 너무 바빠서 물음을 지나치거나 너무 지쳐서 물음을 가슴속에 묻어버리는 것 뿐이다. 타인에게 속내를 들어내는 것은 줄어들지만, 외려 가슴 속에는 정답없는 물음들이 쌓이고 쌓여 썩어가고 있음을 인지하기도 한다. 정답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사는 동안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물음들. 연옥님이 보고계셔가 특별한 해답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가슴 따뜻하게 그려낸다. 나 말고 너도 있고, 당신도 있고, 엄마도 있고, 아빠도 있고, 누나도 있고, 형도 있고, 동생도 있고, 사랑하는 와이프도 있고. 그러니 살아갈 수 밖에. 힘들지만 울컥할 정도로 가슴이 따뜻해지는 순간도 분명 있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어쨋든 연옥님이 보고계시다잖아.

[연옥님이 보고계셔 보러가기]

덧붙여.
-. 해영이는 어떻게 컸을까 너무 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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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대공수사팀과 전직 간첩, 정확하게는 소속 집단으로부터 버림받은 두 인물이 엮어나가는 의형제는 얼핏 남과 북의 이념대립에 관한 영화처럼 보이지만, 돈으로 인해 사람 사이의 인정이 사라져 가는 것을 아쉬워하는 영화다. 그리고 여기에 남/북을 끌어들인 것은 돈이 목적이라면 이제 이념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돈의 문제는 이념을 뛰어넘어 사람의 생사를 가늠하게 되었다. 더이상 빨갱이가 문제가 아니다. 돈은 모든 것을 앗아간다. 이한규 (송강호)는 가족들 먹여살리기 위해 간첩을 잡는다. 대의를 위함이 아니라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서 일을 한다. 그리고 돈에 대한 집착은 그의 인간성을 조금씩 갉아먹는다. 이한규가 송지원 (강동원)에게 동화되는 것은 그가 가진 인간적인 면모 때문이었다. 자신이 돈 때문에 잃어가고 있는 그것 말이다. 이 둘은 베트남을 위시한 동남아로부터 시집와서 이러저러한 이유로 가출한 여성들을 찾아다니는 일을 한다. 돈 때문에  팔려왔지만, 정작 뿌리를 내리지도 못하고 가출한 여성들말이다. 그러니까 이들이 하는 일은 돈으로 시작된 관계지만, 그래도 인간이란 돈 이상의 '정'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그들을 찾아다니는 셈이다. 그 과정에서 간첩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감성적으로 그려지는 송지원에게 이한규의 마음이 동하는 것이다.

영화속에서 국가적인 대의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한규는 물론이거니와 송지원도 마찬가지다. 죽음에 임박해 피를 토하면서도 자신은 배신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정도지만, 그가 '김정일 만세' 따위의 이야기는 한번도 내뱉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조국을 위해 온몸을 다바친다는 느낌보다는 자기가 속해 있는 조국에 적어도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것에 방점이 찍혀 행동하는 인물이다.  또한 조국보다 가족이 먼저다. 송지원 뿐만 아니라 무자비한 그림자의 살인 행각도 이념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대의 보다는 자신의 가치관에 의한 '배신은 용서못해'라는 개인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그는 당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간첩 잡는 반공영화처럼 보이는 이 영화의 미덕은 여기에 있다. 국가 있고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어야 국가가 있는 것이다.

장훈 감독의 첫번째 작품인 영화는 영화다도 꼽씹어 먹는 맛이 나는 영화였는데, 두번째 작품 의형제 역시 마찬가지다. 둘 모두 두 남자의 감정선을 잘 이끌어가며 버디무비의 정석을 보여주었고, 또한 대단히 맛깔스럽고 재미있다. 진중한 이야기를 하지만, 진행은 무겁지 않고 경쾌하다. 게다가 웃겨야할 때 확실히 웃길줄 알고, 몰아칠 때는 확실히 몰아쳐 준다. 초반 오프닝 이후의 그림자 추격작전에서의 아파트씬과 도로 추격씬은 정말 멋졌다. 앞으로 이 아저씨 이름의 영화는 무조건 신뢰하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덧붙여.
-. 결말은 아무래도 좀 생뚱맞긴했다. 해피엔딩이 딱히 싫은건 아니지만 (배드엔딩을 좋아하긴 한다만) 갑자기 톤이 너무 밝아져서 좀 유치하게 느껴졌달까. 너무 급작스럽게 그래서 그들은 정말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답니다라는 느낌.

-. 말해 무엇하랴만은 송강호의 연기는 정말 명품이다. 생활연기의 달인이라는 칭호가 괜히 만들어지는게 아니다. 본래 대사가 맛깔나는 것이 많았지만, 송강호의 입을 통해서 나오면 저 대사는 왠지 그의 에드립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착착 감긴다. 우아한 세계의 연장선에서 그의 연기를 감상하는 것도 좋을 듯하고.

-.  악역은 확실하게 무자비해야 맛이 산다고 생각한다. 그림자 캐릭터는 망설임이 없다. 작업전 피 비린내가 진동한다고 읊조리며, 총을 쏘아대며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솜씨가 대단하다.

제목: 의형제 (2010)
감독: 장훈
배우: 송강호, 강동원, 전국환, 고창석, 박혁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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