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서 갱단에게 소중한 아들을 잃은 한 남자. 법의 얕은 심판보다는 스스로 처형하기를 결정하고 그를 찾아가 살해한다. 이제 형제를 잃은 갱단은 그 사내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다가오고 길 잃은 폭력은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켜 버린다.

쏘우 시리즈의 제임스 왕의 2007년작인 데스 센텐스는 이런 지극히 단순한 스토리의 복수극이다. 처음 들어본 얘기도 아니고 반전도 없다. 오히려 너무 우직하고 순진해서 환호하게 된다. 아들을 잃은 사내의 복수심과 어우러지는 정의에 대한 물음은 스타일리쉬한 화면에 파묻혀 방향성을 잃어버리기도 하지만 그런 우려는 케빈 베이컨이라는 굵직한 배우의 눈빛이 종식시켜 버린다. 케빈 베이컨이 병실에서 아들에게 사랑한다 얘기하고 자신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기를 결심하는 순간의 그 눈빛은 폭력의 역사에서 보여준 비고 모텐슨의 섬뜩함과 닮아있다. 역시 대단해!

정의이건 복수이건 한번 시작된 폭력은 멈출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를 형성하고 그곳에서 빠져나가는 길은 결국 죽음밖에 없다. 폭력에 발을 들이미는 순간 그것은 더 큰 폭력이 되고 시작점에서 멀어질수록 선인과 악인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케빈 베이컨이 말하는대로 그것은 혼돈이고 혼돈이란 경계가 없는 것이다. 전쟁에 대한 명분은 그것을 일으킨 자에게는 모두 옳지만 결국 모두 죽어갈 뿐이다. 사내가 시작한 전쟁은 결국 모두를 죽음에 빠뜨리고 스스로도 파멸해간다.

데스 센텐스가 묘사하는 폭력이 그것에 한번 빠져든 인간이 폭력에 경도되어 무차별 살육을 벌인다는 여타의 영화들과는 차별적인 지점이 존재하지만(정확히는 모호하다고 해야할듯 싶은데) 결국 아내와 아들을 잃은 사나이가 복수를 마쳤을 때 자신의 차가 아닌 폭력배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죽음을 맞는다는 설정은 그다지 가벼워 보이지 않는다.

속도감 있는 스릴러로 시작해서 스타일리쉬한 느와르로 끝을 맺는 데스 센텐스는 마치 건조하고 냉랭한 아벨 페라라의 영화를 전성기 때의 오우삼 스타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제임스 왕은 다음에 어떤 장르로 복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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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비닛캐비닛 - 10점
김언수 지음/문학동네

캐비닛은 심토머라 불리우는 돌연변이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사람, 입안에 도마뱀을 키우는 사람, 시간을 통째로 도둑 맞는 사람,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모두 가지고 있는 자웅동체의 사람 등등 어떤 사람들은 돌연변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초능력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작가 김언수는 이런 심토머들을 진화론적인 입장에서 새로운 인류라고 부른다. 그것은 그들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 인간미 같은 소소하지만 중요한 것들을 그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거꾸로 말하면 현재의 인류에게는 그런 것들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캐비넷에 등장하는 이 돌연변이 인간들은 처음에는 그 자체로 신기하고 재미있게 보이지만, 읽을수록 독자는 돌연변이 인간들에게 감정이입을 하게되고 이건 소수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나와 당신의 이야기로 천천히 방향을 선회한다.

괴물같은 소수자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저 그들이 신기해서라기 보다는 대체로 그들의 비주류의 삶에 공감하고 설사 나는 그런 상황에 처해있지 않더라도 마음 속 일부분은 절름발이로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심적 동조는 때로는 동정과 연민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스스로에 대한 희망의 모습을 띠기도 한다.

하지만 캐비닛은 농밀하고 진지하지만 경쾌한 언어로 let it be라는 삶의 지혜를 쏟아낸다. 방관하라는 말이 아니라 거기에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무엇인가를 해야할 필요는 없다. 그저 '인정'하면 되는 것이다. 무책임하다고? 삶의 폭력성은 인정하고 바라는 것 보다는 이해한다고 착각하며 간섭하는데서 나온다. 인정하는 것과 외면하는 것은 혹 행위가 결여된 것일지라도 분명 다른 것이다. 타인에 대한 이해는 불가해한 것이므로 인정을 한다는 것이 인생을 조금은 풍요롭게 만들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첫걸음이자 인간이 할 수 있는 최후의 미덕이 아닐까 생각한다.

캐비닛은 엑스파일에나 등장하는 돌연변이들로부터 이런 얘기들을 들려준다. 심사자들은 종반부의 섬뜩함과 잔혹함을 생경하고 어울리지 않는다고 평했지만, 캐비닛이 시종 은유하고 있는 현실의 폭력성을 이런 결말보다 잘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우리는 정말 잔혹한 세계에 살고 있지 않은가? 만약에 종반부의 설정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전까지의 돌연변이 이야기가 삶을 고급스럽게 은유하고 있다면 종반부는 너무 직설적이어서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야하지 않을까?

하나의 책이나 영화 속에 웃음과 감동, 연민, 공감 등의 키워드가 모두 들어있는 종합선물세트라고 하면 대개는 그 어느하나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김언수의 캐비닛은 배꼽을 잡고 포복절도할 유머와 나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게 할 잠언과 같은 문장들이 함께 섞여있는 그야말로 발군의 작품이다. 김언수라는 이름을 체크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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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밭 엽기전목화밭 엽기전 - 10점
백민석 지음/문학동네

목화밭 엽기전의 도입부를 읽으면 이것이 남성의 이야기인지 여성의 이야기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남성이라고 생각했는데 삼촌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서 강간을 당하고 여성인가?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순간 이 인간이 건장한 남성에게 섬뜩한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여성이 등장할 때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 여성이 가지고 있는 타인에 대한 폭력의 관심은 일반인의 상식을 훌쩍 뛰어넘습니다. 그것은 마치 날것만이 남아있는 원시시대의 식욕이 고스란히 성욕 내지는 폭력행사의 욕구로 분출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현대적 무기인 각성제와 함께 말이죠.

이 소설은 이런 남성과 여성의 의미가 무의미(물론 남성과 여성의 특성에 기인한 특유의 영역을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만)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폭력성과 잔혹함만이 남아있는 두명의 인간이 부부로 만났을 경우의 상황을 그리고 있어요. 그리고 그 뒤에는 삼촌이라는 불리우는 거대한 폭력 집단을 배후에 넣고 있고요. 이 둘의 직업은 대학 강사와 수학을 가르치는 과외선생님입니다. 누가 누구인지 모르겠지요? 남성과 여성의 의미가 무의미해진 공간, 그것은 현생을 뛰어넘은 본능만이 판을 치는 공간인 말 그대로 지옥을 묘사합니다. 이 소설은 그래서 정말 지독한 현실을 그리고 있지요. 그들이 현대적인 식자 계층인 것도 많은 메타포를 함유하고 있지만 이것은 어떤 은유를 넘어서서 독자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뭔가가 있어요. 왜냐하면 읽는이도 인간이기 때문이지요.

많은 영화나 소설들에서 이성이 사라진 인간의 뇌 속에 남아있는 것은 오직 폭력 뿐이라는 주제를 그리는 것들이 많아졌어요. 단순히 소제를 확장시키다보니 매체가 이런 자극적인 것들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럴까요?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문학 작품도 인간의 상상력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것들은 대개 현실에 한쪽 발을 담그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작가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죠. 하물며 목화밭 엽기전 같은 소설은 그 문장이 지니고 있는 현대사회의 날카로운 풍자만으로도 그것이 현실을 자양분으로 삼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요. 그래서 이 소설은 그 자체로 현대 사회가 지옥임을 암시합니다. 그것도 돈에 얽혀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잔혹함을 말이죠.

어떻습니까? 한번 읽고 싶어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단단히 각오하셔야 할거에요. 여자를 잡아다가 온갖 고문을 행하며 사육을 행하는 소설들도 많았고, 여자 성기를 가지고 다니며 자위를 하는 남자를 다룬 이야기도 있었고, 여인의 빠진 이빨을 주전부리처럼 입안에 넣고 다니며 사탕처럼 빨아먹는 살인마도 있었고, 어린 여자를 잡아다가 10년가까이 사육한 영화들도 있었지만, 이 소설은 그런 모든 것들을 뛰어넘는 심리와 '날것!' 그대로의 잔혹함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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