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영화에서 최고의 진가를 발휘하는 샘닐과 20대의 생동감 넘치는 니콜 키드만이 함께한 필립 노이스 감독의 89년도 영화-죽음의 항해. 영화는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해 떠난 요트 여행 중 바다 한 복판에서 조난된 괴이한 인물을 만나 죽도록 고생하는 부부의 이야기이고, 영화의 등장인물은 이 세명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요트 장면으로 연결되기까지 그러니까 오프닝으로부터 아들이 죽기까지의 과정을 음산한 스코어와 함께 10분 가깝게 별다른 대사도 없이 진행되는 멋진 장면이 끝난 후부터의 등장인물은 개를 제외하곤 단 세명이다. 즉 1시간 20분 동안 영화 속에서는 샘닐과 니콜키드만, 빌리 제인만이 그 좁은 요트안에서 숨막히는 추격전을 벌인다.

등장인물이 적은 스릴러 영화는 기본기가 탄탄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죽음의 항해는 교과서적이라 할만하다. 꽉찬 내러티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어디가 끝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망망대해의 열려진 공포감과 작은 요트에서 벌어지는 숨막히는 폐소공포증은 대구를 이루며 답답함을 극한으로 이끌어내고 음악이라고는 오직 바다에서 들리는 파도소리와 세명 등장인물의 헐떡이는 숨소리만으로 채워져 긴박감은 가히 최고다.

빌리 제인이 연기한 사이코 캐릭터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부기맨이라기 보다는 히스테릭한 정신분열병 환자와 같은 유약한 인간으로 그려져 슬래셔 영화의 살인마와는 차별성을 보인다. 마지막에는 공포영화의 엔딩을 고려하여 그가 다시 등장하는 클리셰를 선보여 식상할 듯 보이지만, 슬래셔 영화가 막을 내리는 80년대 끝자락에 나온 이 영화의 후련한 엔딩은 그런 식상함을 단번에 비웃어 버린다.

에일리언2가 등장한 이후 스크린을 수놓기 시작한 강인한 여전사 캐릭터는 죽음의 항해에서 니콜 키드만에게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아이를 잃은 어머니가 슬픔을 극복하는 성장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고 넓은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는 남편을 찾기 위해 작은 요트에서 살인마와 힘겨운 사투를 벌이는 독립심 강한 한 여성의 이야기이기도하다. far and away 이전에 그녀가 알려지게 된 계기이기도 한 죽음의 항해는 그녀 자신이 요트를 직접 운전하는 등의 열연을 펼쳐보인다.

구멍난 배에서 1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별다른 대사없이 배를 수리하고 물을 퍼내고 다시 차오르는 물에 잠겨 허우적 거리며 공포감을 표출해내는 샘 닐은 역시 발군이다. 공포영화에서 빛을 발하는 최고의 배우를 꼽으라면 역시 언제나 샘 닐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제목: 죽음의 항해 (Dead calm, 1989)
감독: 필립 노이스
배우: 샘닐, 니콜 키드만, 빌리 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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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뿐이야.

Record? 2008. 1. 11. 12:00

긴 바바나 쿠션을 다리 사이에 끼고 폭신폭신한 베개에 머리를 대고 잠을 청하면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 속에서 아우성을 친다. 매일같이 찾아오는 불면의 밤. 밤사이 괴로운 꿈에 시달리고 건조한 방안에서 눈을 뜨면 다시 어제와 똑같은, 아니 1년전과 똑같은 일상이 되풀이된다. 미친듯이 일을 하다 불현듯 찾아오는 잊고 있던 기억에 또다시 상처는 벌어지고 정신을 놓아버린다. 정신차려라는 동료의 한마디에 다시 웃음을 찾고 슬그머니 일상속으로 기어들어간다. S가 생각나 다시 바보처럼 웃음이 나기도 하는 기쁨과 슬픔이 싸인곡선을 그리며 춤을 추는 매일의 일상들. 힘드냐고? 아니 그렇지 않아. 그냥 그 뿐이야. 그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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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컷B컷 - 10점
최혁곤 지음/황금가지

한국형 스릴러라는 문구를 달고 나온 최혁곤의 B컷. 스릴러와 한국형은 왠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최근 세븐 데이즈가 히트를 치기는 했지만, 국내 스릴러 영화, 그러니까 고부의 갈등 같은 가족적인 심리전이 아니라 킬러와 형사가 추격전을 벌이는 형태의 한국 스릴러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들어서야 영화 쪽에서는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는 스릴러 장르물이 나오기는 했지만, 소설로는 어떤 것이 있었는지 한개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형 스릴러?라는 물음표와 함께 자연스럽지만 두 단어가 만났을 때 느껴지는 생경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B컷은 이런 우려를 단번에 기우로 만들어 버렸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서울이라는 공간이 담고 있는 쓸쓸한 정서-교통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이웃들끼리 죽일듯이 싸우는 공기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거주하지만 서로에게 모두 타자가 되어버린 인물들-를 담고 있고 그것이 한국이라는 토양에서 기인한 것이기에 개인적으로 매우 마음에 들었다.

소설은 추적당하는 여자킬러와 추적자인 퇴물형사의 이야기를 병렬적으로 보여준다. 챕터별로 짧게 진행되는 개개의 에피소드는 스피디하게 진행되어 지루함을 느낄틈이 없으며 그 병렬의 구조가 교차하는 순간, 즉 추적자와 피추적자가 조우하는 클라이막스에서 한껏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 둘은 모두 불행한 과거사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느낄 수 있는 키워드를 통해서 보여준다. 과거의 어떤 시점이 아닌 현재를 배경으로 롯데리아니 장동건이니 태풍이니 하는 단어들을 사용하고 주변에서 흔히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던 사건사고들을 배경에 넣음으로써 쉽게 감정이입을 일으킨다. 우연한 기회에 킬러가 되고 그를 이끄는 카리스마 강한 지도자를 만나 킬러가 되는 소녀나 소통에 문제가 있는 무능력한 형사의 모습은 많은 마피아 영화나 느와르 영화에서 보여지던 클리셰를 답습하고 있지만, 그 고루한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게 하는 것은 역시 작가의 능력이다. 텔로미어에 관한 이야기의 중심사건이나 반전은 그다지 충격적이진 않지만 한국을 넘어 미국과 중국을 넘나드는 장소의 방대함은 디테일하게 잘 묘사되어 국내소설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참신함이 느껴진다. 대개 우리나라 소설이나 영화는 장소가 커지면 그 규모에 짓눌려 현실성을 잃어버리곤 했는데 작가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오히려 그 장소가 국내의 익숙한 지형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디테일하게 잘 묘사가 되어 있다. 그래서 B컷을 영화로 만들면 어쩌면 의외로 소소한 영화가 될 거란 생각이 들었고 이것이 이 책의 또다른 매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해외 로케라고 해서 거대함만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 우리나라가 아닌 이상 외국의 어떤 뒷골목을 찍더라도 그 나라의 분위기는 충분히 전달이 되기 때문이다.



쫓는자와 쫓기는 자의 '고도의 심리전'은 문자 그대로 머리를 쓰고 서로를 피해가는 이성을 지칭하는 것 보다는 서글픔과 불행을 공유하는 감성의 심리전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옳다. 그래서 어쩌면 머리싸움을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으나 우울함과 외로움을 선천적으로 짊어지고 있는듯한 인물들이 그보다 더 아래의 바닥으로 떨어지는 이야기는 언제나 나를 매료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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