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그림자

See-booK 2007. 2. 27. 10:55
바람의 그림자 1바람의 그림자 1 - 10점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문학과지성사
어릴적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다니엘은 어느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이른 새벽 '잊혀진 책들의 묘지'에 가게 된다. 그곳에서는 단 한권의 책만을 고를 수 있고 자기가 고른 책과 이 묘지에 관해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된다는 규칙을 가지고 있다. 다니엘은 훌리안 카락스라는 작가가 쓴 '바람의 그림자'라는 책을 고르게 되고 이제부터 그의 기나긴 여정이 시작된다.

2001년에 출간된 스페인 작가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이 지은 '바람의 그림자'는 수많은 액자 구성을 가지고 있는 전쟁서사극이자 기묘한 사건을 둘러싼 추리극이며 소년의 지독한 성장통을 담은 성장소설이자 인간의 본성을 파헤치는 공포소설이며 그것을 사실적이면서도 초현실적으로 연출하는 괴담집이고 재치가 넘치는 유머로 포장된 사랑의 잠언집이고 영상에 의해 버림받는 소설의 읽는 즐거움을 되찾으려하는 노력이 돋보이는 그야말로 걸작이다.

다니엘은 훌리안 카락스의 소설에 등장하는 악마와 실재로 조우하게 되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카락스의 과거를 파헤치게 된다. 그러다 전 유럽을 돌아다니며 그의 책을 불태우는 화상입은 남자가 카락스 소설의 인물임을 알게 된다. 그러던 도중 스페인 내전의 희생자인 페르민이라는 남자를 만나고 스페인의 이름난 악질살인마인 푸메로 경위에게 또다른 위협을 받게 된다. 그리고 카락스를 둘러싼 비밀이 사실은 자신의 주변인물들과 연결이 되어 있음을 알게되고 그것이 스페인의 전쟁을 통해서 흥망하던 사람과 인물들의 가족사와 연애사가 서서히 밝혀진다.

결국 이 소설은 다니엘이 책장을 넘기면서 시작된 소년의 모험인데 이것은 책을 읽는 즐거움을 독자를 포함시켜 쓴 액자구조로 보여주어 '읽음'의 즐거움을 온 낱말을 통해서 보여준다. 정말로 말끔한 문체로 인물들을 묘사하고 사건을 서술하는 문장들 하나하나의 비유는 예술에 가깝고 페르민을 입을 통해서 펼쳐지는 연애와 사랑에 대한 성찰은 그것자체로 명언이다.

그리고 이 책은 온통 상실감으로 뒤덮여 있다. 과거에 한 여인을 사랑했지만 더러운 거리에서 싸늘한 시체로 부패하여 발견된 천재작가의 과거의 사랑과 시작도 못해본 소년의 사랑 그리고 앞으로 이루지 못할 사랑이 전쟁과 혼돈의 사회에서 발작적으로 벌어지는 폭력의 이름인 푸메로라는 인물에 의해 짓밟혀 버린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준비못한 상태에서 다가오고 미처 깨닫기 전에 떠나가기에 이야기속의 폭력과 죽음은 더욱 비극적으로 느껴진다. 결론적으로는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려 아쉽긴 하지만-개인적으로 이 점이 매우 안타깝~- 책을 읽어나가면서 다 읽기가 아쉬워서 일부러 천천히 읽어나간 것은 정말정말 오랜만이지 싶다. 제목도 너무나 멋진 '바람의 그림자'는 그야말로 오랜만에 절대 초강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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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불꽃푸른 불꽃 - 10점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창해
기시 유스케의 푸른불꽃은 계부와 동급생 살해라는 자극적인 키워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애절한 슬픔의 감성을 가득 담고 있는 소설이다. 자전거 타기와 그림그리기를 좋아하는 고등학생 슈이치는 어느날 예고없이 들이닥친 계부의 보이지 않는 압박으로 인해 자신을 포함하여 가족들이 행복한 나날을 빼앗기고 숨죽이며 살아가는 것에 분노한다. 평범한 일상이 불쑥 거대하고 달아날 수 없는 폭력의 고리에 던져지자 슈이치는 완전범죄를 꿈꾸며 계부를 살해하고자 한다.

소설 속의 슈이치는 완전범죄가 정말 있을까라고 끊임없이 자문하며 공부하고 또 공부하여 스스로 이것은 완벽하다(!)라고 생각한 뒤에 범행을 실행하지만, 이 슈이치라는 주인공이 결코 냉정하고 계산적이지 못해 성공하지 못한다. 슈이치가 여자친구인 노리코에게 '너는 사실은 여성적인 아이가 맞는거지?'라고 세뇌시키듯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사실이기 때문에 그가 살인이라는 범죄에 무감각해져 보일 때에도 읽는 사람은 오히려 더 안쓰럽게 바라보게 된다. 사실 슈이치는 –반복되는 살인 속에서-살인에 무감각해진 것이 아니라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 그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가 저지르는 범죄의 잔상들이 더 안타깝고 크게 느껴진다. 그는 이미 범죄를 저질렀기에 그가하는 반성은 때늦은 후회이고 폭력이 폭력을 부르는 그 무한의 순환고리에 발을 딪었기에 빠져나갈길 없는 막막함에 가슴이 답답하다.

슈이치가 선택한 살인이라는 함정이 과연 마지막 수단이였을까라고 읽는 순간 함께 고민하면서도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이 느껴지는(!) 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진 거인의 잠재하고 있는 숨막히는 존재의 폭력성에 잠식당하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면 차라리 죽여버리는 것이 빠른 판단이었을 것이라고도 공감한다. 그래서 슈이치가 범행을 계획하는 순간부터 같이 나도 범죄에 동참하여 어떻게하면 완벽한 트릭을 구사할 수 있을까 자연스럽게 고민하게 되기 때문에 이 책의 흡입력은 굉장하다. 게다가 이녀석이 구사하는 범죄라는 것이 헛점 투성이 인지라 읽으면서 '아~ 언젠간 잡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게되고 손에 땀이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런 묘사를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소년의 언어로 이야기 하는 '기시 유스케'에 대한 감탄이 절로 나온다.

자기가 저지른 범죄의 무게와 분노의 깊이와 죄의 크기를 헤아릴 수 없었던 슈이치는 결국 분노와 함께 가장 뜨거운 푸른 불꽃처럼 파랗게 연소하고,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여운이 너무 많이 남아서 나도 모르게 주르륵 눈물을 흘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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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네이버에서 카페를 통해 번역활동을 하고 계시는 켄시로님의 '사막의 해적' 카페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10회 일본호러소설 대상 수상작 '아네카이'(아네 사육)는 엽기적인 상상력을 통해 인간 내면에 잠들어 있는 폭력적인 본성과 생물학적 삽입이 아닌 매질을 통한 섹스와 여성에게서 느껴지는 마성적인 매력에 중독되어 급기야 자신을 파멸시키고 살인자가 되어버리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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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챙이에 키워진 아네(
)-일본어로 누이라는 의미-라는 정체불명의 생물체는 마을의 축제에서 불법적으로 팔린다. 주인공 소년은 아름다운 옷이 입혀진체로 꼬챙이에서 몸을 비틀며 고통에 찬 것인지 환희에 젖은 것인지 모를 신음소리를 내지르는 아네를 보고 한눈에 반해버린다. 하지만 아네는 날 것을 먹고 매우 힘이 세고 폭력적이며 아네를 키우는 것은 일종의 불법 행위이자,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 저속한 행위란 것을 알고 자신의 욕망을 발산하지 않는다. 대학에 가지 않고 취업하여 돈을 열심히 벌어 그는 드디어 아네를 구입한다.

작가 엔도 토오루는 아네라는 괴이한 크리쳐를 통해서 인간이 넘어서지 말아야할 것 같은 금단의 영역으로 유혹한다. 아네라는 것이 본문에 따로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그냥 여성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소설 속에서 아네는 하얀 가슴을 내놓고 교성을 지르고 주인공은 아네를 화장시키는 등 여성처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등장인물 한 사람은 자신의 부인을 죽이고 꼬챙이에서 빼낸 아네를 자신의 부인처럼 데려가는데 그 때의 아네는 이성이 있는 사람처럼 말을 한다. 그러니까 아네라는 존재는 보통의 여성을 죽지 않을 정도로 꼬챙이에 찔러 놓은 것 같다. 사람들은 이 아네를 돈을 주고 사서 애완동물처럼 키우는데 그 수명이 3개월 정도로 짧아 또다른 아네를 사기 위해 마약중독자처럼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 이 얼마나 기묘하고 뒤틀린 세계인가
.

소설은 이 아네와 기름축제라는 구역질나는 풍경과 아네의 포획자와 구매자, 그리고 형사를 등장시켜 짧지만 강렬한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이런 직설적이면서도 강한 이야기는 정말 오랜만에 본 것 같다. 검열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 요즘인데 이 책이 과연 국내에 출간이 될 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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