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설이다는 뱀파이어 혹은 좀비라고 불러도 좋을 변종인류가 지구상의 주종으로 등장하여 그동안 지구를 지배해온 인간을 대신한다는 내용이다. 숫자의 우위에 따라 정상과 비정상의 관계가 전복되어 버리는 다분히 철학적인 물음들은 책의 제목이자 대미를 장식하는 대사인 '나는 전설이다'라는 네빌의 독백을 통해 전율을 안겨주었다. 이는 전설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거대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문장 하나를 통해서 책의 시작과 끝, 그리고 세계를 완전히 뒤엎어버리는 영민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나는 전설이다'라는 문장 자체의 무게감을 철저히 외면해 버린다. 소설 속에서 네빌이 끊임없이 인간에 대해서 고민하고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선이 무엇인지 사유하는 행위들은 영화 속에서는 그 자신이 인류를 구원하는 슈퍼맨의 이미지로 대치된다. 이는 원작이 품고 있는 전설이라는 의미를 전혀 다른 형태의 블록버스터로 탈바꿈시켜 버린다. 콘스탄틴의 감독인 프란시스 로렌스라 변형은 있더라도 원작의 진중함은 가져올 줄 알았는데 이 부분이 대단히 아쉽다. 저 멋진 제목이 사실 아까울 지경이다.

이 영화를 원작과 별개로 본다면 그다지 나쁘진 않다. 조용한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액션씬도 박력이 넘쳤고,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네빌이 수류탄을 뽑는 시퀀스의 감정과 마무리는 대단히 멋졌다. 혼자 남은 인간의 고독을 대변하듯 네빌의 방을 장식하고 있는 고흐 그림들도 좋았고, 네빌의 장롱에 보일듯 말듯 숨어있는 '좋은 친구들'의 DVD도 인상적이었다. 이런 디테일한 소소한 재미도 있고, 영화 자체가 나쁘진 않았지만, 거대한 무언가가 사라져 버린 '나는 전설이다'는 역시 허전했어.

영화 시작전 아무 사전정보 없이 약10분 가량 배트맨의 다음 이야기인 '다크 나이트'의 예고편을 해주었는데, 이게 '나는 전설이다' 본편보다 훨씬 감동이었다. 은행강도를 하면서 동료들조차 무참히 죽여버리는 가면살인마는 마치 할로윈의 마이클 마이어스가 사람을 칼로 찌른 뒤 폭력의 잔혹함을 음미하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장면을 재현하고 그 가면을 벗었을 때 스크린을 수놓는 히스 레져의 조커 페이스는 그야말로 압권이다. 아~ 기대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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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트 러쉬는 일종의 가족 판타지 영화다. 부모에게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은 소년, 그리고 하룻밤의 사랑으로 관계가 끝나버린(사랑이 끝난것이 아니라) 남녀가 각자의 음악에 이끌려 뉴욕이라는 거대한 인간시장의 한점에서 만나게 된다. 이 영화에서 우연에 기대지 않는 사건은 한번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정도가 아니라 애초에 이 영화는 내러티브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어거스트 러쉬는 자신의 지향점을 잘 알고 있고 그러므로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똑똑히 알고 있다. 무식한 판타지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영화의 간극은 한스 짐머와 마크 맨시니의 오리지널 스코어로 꽉꽉 채워져 있으며 지루하다고 느껴질만한 클래식 연주는 편집을 통해 rock 음악과 퓨전을 이룬다.


소년이 처음 접했던 도시의 소음들이 그 자신의 머리와 가슴으로 음악이 되어가는 과정은 자토이치같은 영화에서도 보여주었던 것이었고 신선할 것도 없지만, 마음을 울리는 음악은 이성을 초월하여 감성을 자극하는 법. 어거스트 러쉬는 그런 좀 우습지만, 똑똑한 영화다.

천재가 등장하는 영화들이 대개 그렇지만, 이 영화에서 어거스트 러쉬에게 기타 선율을 처음으로 들려주었던 흑인소녀는 그의 천재성에 감동을 받았겠지만, 어쩌면 그를 만난 이후의 음악은 그 이전보다는 즐겁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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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노랫소리

See-booK 2007. 12. 13. 09:11
고독의 노랫소리고독의 노랫소리 - 10점
텐도 아라타 지음/문학동네
사회파 소설들은 이 사회가 떠안고 있는 병폐와 부조리들을 자양분으로 삼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유독 가족이라는 이미지의 몰락과 허상을 묘사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그것은 거꾸로 지금 이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집단인 가족이 많이 병들어 있음을 반증하는 것일게다.

텐도 아라타의 '고독의 노랫소리'도 그런 이야기를 한다. 불륜으로 낳은 아들과 그 불륜에 상처입고 버림받은 어머니의 비뚤어진 가치관은 아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그 아들은 어머니의 최면에 가까운 세뇌에 의해서 왜곡된 인생을 살게되고 엽기적인 여자사육을 행하게 하지만 그가 납치한 여자들에게 바라는 점이 단순한 성적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이 공명하는 진실된 이해라는 측면에서 이 소설의 장점이 발현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악마에 가까운 인물인 타카시는 어머니에 의해서 사회와 단절되지만, 그의 어머니도 불륜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가족에 의해 버림받는다. 다른 등장인물들도 마찬가지. rocker를 꿈꾸는 소년도 학교에 속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여형사는 어린시절 납치/살해당한 친구에 대한 죄책감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지못한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과 부딪히고 대화를 하지만, 철저히 고독한 존재인 사람. 그리고 그 사람들의 최소집단인 가족. 따뜻하지만 각도를 약간 달리하여 보면 선택의 자유가 없다는 점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큰 폭력 중의 하나인 가족. 가족사이에서 조차 섬이 되어가고 있는 슬픈 인간군상들이 보여주는 '고독의 노랫소리'의 범죄는 그래서 엽기적이고 잔혹하지만 마음을 울리는 뭔가가 있다. 왜냐하면 혼자있기를 원하면서도 끊임없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타인과 소통하려는 모습은 형체가 없는 허상을 쫓는 것 같아 슬픔이 느껴지기 때문.

히치콕의 사이코, 피터 오퀸이 열연한 스텝 파더, 여성의 가슴과 성기를 칼로 도려내는 잔인성을 보여준 살육에 이르는 병 등의 작품과의 유사성을 피할 순 없겠지만, 이 정도 필체라면 텐도 아라타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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