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기억붉은 기억 - 10점
다카하시 가츠히코 지음, 오근형 옮김/이야기(자음과모음)
다카하시 가츠히코의 '붉은 기억'은 기억을 테마로 한 일곱개의 단편이 실려있는 소설이다. 세월이라는 이름에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한 추잡함에 자신도 모르게 감추어진 기억에 얽혀진 사건들이 우연한 발견을 통하여 플래시백 되어 그 시절로 돌아간다는 형식이다. 기억의 끝자락까지 도달하기 위해 이야기는 괴담, 공포소설, 추리소설등의 외피를 쓰고 있다. 하지만 이 단편들이 왜곡된 기억의 말단에 도달하기 위해 쓰여지는 방식은 타인의 일기를 훔쳐보는 것처럼 섬세하고 아련한 감성을 들춘다. 붉은 기억, 뒤틀린 기억, 말할 수 없는 기억, 머나먼 기억, 살갗의 기억, 안개의 기억, 어두운 기억이라는 제목이 달려있는 단편들은 동네 지도, 친구의 편지, 동창회 등등의 각각 다른 매체를 통하여 기억을 회귀시킨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인간이 가진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으로 조작이 될 수 있는지 느끼게 되어 놀랄 때도 있고, 그와 정반대로 어떤 기억은 당시의 냄새나 햇살의 감촉이 온 몸으로 느껴질 정도로 생생하게 되살아나서 소름이 돋을 때도 있다. 정말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동창회에서 별로 친했다고 기억되지 않던 친구의 입에서 튀어나온 사건을 듣고 그 때의 일이 마치 눈앞에 펼쳐진 것처럼 느꼈던 적도 많았다. 그런 기억들도 세월에 희석되어 나름대로 다시 정렬이 되어있겠지만, 그리운 기억들은 몸 속 어디엔가 지울수 없는 DNA처럼 영원히 각인되어 있지 않나싶다. 이 소설은 그런 기억의 저편에 서리가 뿌옇게 낀 창문을 조금씩 닦아가듯 도달하게 한다. 추리소설이면서도 타인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기분. 딱 그런 기분이 '붉은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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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에는 세번의 살인이 등장한다. 자유분방한 여자친구를 살해한 남자, 안하무인의 아들을 죽인 아버지, 자기만의 청사진을 그려놓고 여자를 그곳에 끼워맞추려고 하는 불륜의 애인을 살해한 여자. 이들은 모두 타인과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 그들은 상대방에게 거의 잊혀진 존재나 다름이 없었다. 큐어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자신의 불만감으로 인해 쉽게 최면에 걸렸던 것처럼 절규에서도 마찬가지로 존재 자체의 무관심과 망각으로 인해 쉽게 유령에게 홀려 살인을 저지른다. 즉 그들은 영화속의 대사처럼 '모든 것이 없었던 것처럼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있어도 없는 존재, 누군가의 마음속에 기억되지 못하는 존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기에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타인의 존재도 함께 소멸(죽여)시킨다.

바다를 메우고 뭔가를 새우고, 있던 건물을 부수고, 다시 세우고, 텅빈 공간에 무언가 창조되고 파괴됨으로써 빠르게 변해가는 도시의 풍경속에서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는 속도의 세계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의 마음속에서도 타인과의 관계가 끊임없는 소통과 망각이 반복됨으로써 현대인들이 누군가에게 망각되어 간다는 것 혹은 잊어선 안될 것들을 잊어가고 있다는 것을 은유한다. 마지막에 요시오카만 혼자서 유령과 자신의 손으로 살해한 애인에게 용서를 빌고 구원을 받은 듯 하지만, 결국 빨간옷을 입은 유령은 요시오카를 제외한 전세계의 인간을 죽게만든다. 심지어 요시오카의 죽은 애인은 내내 선한 인상으로 남아있다가 그를 떠나기 직전에 유일하게 섬뜩한 귀신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결국 그녀는 그가 이 세상에서 혼자 남겨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 혼자 살아남은 요시오카는 정녕 구원 받은 것인가? 그래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해피엔딩을 가장한 절망적인 배드엔딩이다
.

절규에 등장하는 유령의 묘사는 가끔 너무 순진할 지경이어서 조소를 자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무섭지 않은, 아니 웃음이 나기까지 하는 유치한 유령이 스토리와 잘 어울릴때 그것이 어떻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지를 보여주지 않았나한다. 공포영화스럽지 않은 외피를 두른 공포영화인 구로사와 키요시 영화의 특징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나의 감독에 대한 무한애정 때문 일수도 있고
...

지진의 진동으로 시작되는 다른 세계와의 연결-불길한 기운이 감지되고 귀신이 나타나고 최면에 걸린듯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살인을 저지르고 깨어나는 현실을 그리는 영화의 분위기는 그의 다른 영화와 같이 만족스럽다. 절규의 재미는 큐어와 회로를 넘어서진 못하지만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들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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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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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슈퍼맨 귀신은 뜨악하기는 했고, 다이빙 귀신은 놀라웠다.

제목: 절규 (Sakebi, 2006)
감독: 구로사와 키요시

배우: 야쿠쇼 코지, 코니시 마나미, 이하라 츠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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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육에 이르는 병살육에 이르는 병 - 10점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권일영 옮김/시공사
반전이 뒤통수를 후려친다는 아비코 다케마루의 살육에 이르는 병은 개인적으로 반전에 대해서는 크게 감흥이 없는 사람인지라 마지막 책장을 덮고서도 '아~ 그랬구나' 정도의 여운이었다. 한 문장으로 전체의 이야기를 거꾸로 뒤집어 엎어버리는 것은 절약적이고도 대단하다고 생각되지만, 어차피 그런 범죄를 저지른 대상이 누구냐이기 보다는 어떻게, 이렇게 잔인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인물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읽으면서 가끔씩 '그럴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가슴속에 떠올라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당연하겠지만, 모든 범죄장면에서 그랬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 정도로 변태는 아니거든요.)

살육에 이르는 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사랑에 대한 육체적/감정적 불구자들이다. 끔찍한 페티쉬 취향의 네크로필리아인 미노루가 그렇고, 언니의 모든 것을 빼앗는 것에만 집착하는 가오루가 그렇고, 자신을 돌봐주는 여인을 죽게만들어 죄책감에 시달리는 퇴직형사인 히구치가 그렇다. 심지어 범죄자의 엄마로 등장하는 마사코 또한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며 그저 자신의 현재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그런 그녀의 모습은 자식의 방 쓰레기통에서 정액이 묻은 휴지수를 헤아리는, 가정에 대해 비정상적인 강박증을 가지고 있는 여자로 그려진다. 사랑이 없는 가정인데도 말이다.

미노루가 정상적인 사랑을 못하고 살인을 하여 시간을 행하는, 그것도 성행위를 하는 도중에 살해하여 죽음으로 인해 수축하는 여성의 성기에서 또다른 행복감을 찾아내고 그것도 모자라 그런 엑스터시의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자 비디오로 찍고 유방과 자궁을 도려내서 신체부위를 들고 자위하며 그 순간을 영원토록 곱씹어 보고자 하는 진짜 엽기적인 행동들은 모두 사랑에서 비롯된다. 미노루는 엄마에 대한 근친상간적 성적 욕망에서 비롯된 호기심섞인 반쪽자리 사랑의 감정과 그런 감정도 모르고 있던 상태에서 부모에게 들켜버린 무지의 수치심이 트라우마로 새겨져 비정상적인 어른이 된다. 그래서 끊임없이 진짜 사랑할 상대를 찾아나서는 그의 모습은 다른 범죄자와는 다르게 느껴진다. 그가 저지르는 살인의 잔혹성은 살인의 횟수가 증가할수록 생명에 대한 감각이 무뎌짐에 비례해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사랑에 대한 안타까움에 비례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시점에서 이미 사라져버리기 시작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시간에 비례하여 모래시계 반대편에 위치한 '정'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쌓여가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사랑에 대한 공포감이 이 소설에서는 극단적인 신체훼손으로 대비되어 그려진다. 이런 비정상적인 사랑의 행태는 범인을 쫓는 가오루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녀는 평생 언니의 것이 탐이나서 결국 언니의 남편과 잠자리를 하기까지 해서 형부를 빼앗지만, 결국 그 남자를 사랑하지 못한다. 제대로된 사랑의 감정을 가지지 못하는 가오루 캐릭터는 결국 마지막에 언니가 사랑했던 또다른 남자 히구치를 좋아하게 되지만, 결국 자신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직접적으로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끝까지 지독한 감정을 가지고 있던 이 가오루라는 캐릭터는 살인마 미노루의 또다른 변형이라고까지 생각된다.

다 읽고 광고처럼 정말 책의 앞장을 다시 펼치게 되는 반전의 힘을 어느정도 느끼기도 했지만, 이 소설의 잔혹함에 대해 크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면-그럴수는 없겠지만- 살육에 이르는 병은 지독한 사랑이야기다. 현대 사회에서 친절하고 자상한 외형을 하고 괴물같은 마음을 숨기고 사는 정신병이 살육에 이르는 병이기도 하지만, 사랑이라는 열병만큼이나 살육에 이르는 병이 또 있을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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