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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슬래셔 영화가 범람하면서 할로윈 이후 거의 모든 국경일과 기념일이 살육의 날로 되었는데, 그중에서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한 꽤 근사한 영화가 있다. 찰리 E. 셀리어 주니어 감독의 '사일런트 나이트, 데들리 나이트'가 그것인데, 이 영화가 아마 살인을 저지르는 산타클로스가 처음 등장한 영화가 아닌가 싶다.

할로윈이나 만우절 같은 휴일은 공포영화에 매우 잘 어울리는 날이다. 살인마는 변장을 하여 자신의 모습을 숨길수도 있고-다 그러고 있는데 누가 알겠는가- '살인마가 저기 있다구!'같은 말을 해도 '나 속이는거지? 안 속는다굿!' 같은 대답이 돌아올 것이기에 살인마의 정체도 쉽게 발각되지도 않는다. 게다가 똑같은 산타 유니폼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날 어디 한두명이겠는가. 그래서 산타클로스 복장을 입고 있었다는 이유로 엉뚱한 사람이 살해되는 경우도 생길 수 있고, 이 영화에서도 그런 장면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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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런트 나이트, 데들리 나이트에는 굉장히 불쌍한 빌리라는 소년이 나온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빌리는 정신병원에 있는 할아버지를 만나는데 다른 사람 앞에서는 벙어리 행세를 하는 이 할아버지는 고약하게도 빌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준다. '크리스마스 이브는 1년중 가장 무서운 날이란다. 산타클로스는 1년 내내 착한 일을 한 아이들에게는 선물을 주지만, 한가지라도 나쁜짓을 한 아이에게는 벌을 준다. 너는 올해 내내 착한 일만 했니?'.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 빌리는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강도를 만나게 되고 부모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상의가 풀어헤쳐진채 칼로 목이 그어지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빌리는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 이후에도 빌리의 불행한 생활은 이어진다. 고아원의 원장수녀는 산타클로스를 싫어하는-어떻게 좋아할 수 있겠는가- 빌리를 억지로 산타의 무릎에 앉히고 뛰쳐나가면 허리띠로 두들겨 패고 벌을 준다. 나쁜짓을 하면 벌을 받아야된다는 세뇌에 가까운 체벌을 받고 자란 빌리는 자라서 장난감가게에서 일하게 되는데, 하필 크리스마스날 산타 역할을 빌리가 하게 된다. 피해자의 위치에서 항상 벌을 받고 있었던 빌리는 이제 산타의 복장을 통해 가해자로 탈바꿈한다.


이 영화는 미국 개봉당시 산타클로스를 도끼 살인마로 묘사했다고 부모들이 반대시위를 벌여 흥행에 참패한 비운의 영화다. 대부분의 공포영화가 그렇지만 이 영화에서도 순진한 소년을 살인을 저지르는 산타클로스로 만드는건 어른들이다. 부모가 모두 산타에게 살해당한 소년을 억지로 산타에게 안기고 가슴 아파해야 할 크리스마스에 기뻐하지 않는다고 벌을 준다. 사랑으로 감싸줘도 모자랄판에 벼랑끝까지 내몰아버리는 이 고아원의 원장수녀야말로 정말로 무서운 캐릭터가 아닌가. 부모들이 이 영화에 대해 반대시위를 굳이 벌여야 한다면 산타를 살인마로 그려서가 아니라 어린이를 살인마로 키우는 존재를 수녀로 그렸다는 이유로 반대를 해야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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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래셔 영화가 거의 모두 시리즈로 만들어졌듯이 이 영화도 5편까지 만들어졌는데, 뒷편은 모두 형편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언덕에서 썰매 타고 내려오는 사람의 목만 잘라서 죽이는 장면 빼고 나머지 살인장면은 평범하고, 살인마의 카리스마가 빛을 발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사일런트 나이트, 데들리 나이트는 슬래셔 영화 팬이라면 한번 꼭 보고 넘어갈만한 영화이지 싶다.


제목: Silent night, deadly night (1984)
감독: 찰리 E. 셀리어 주니어

배우: 로버트 브라이언 윌슨, 릴리안 쵸빈, 타라 버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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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2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2 - 10점
이종호 외 8인 지음/황금가지
작년에 이어 올해도 한국공포문학단편선이 '두번째 방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찾아왔다. 앞으로 얼마나 이어질지 모르겠으나 백이십오번째 방문정도까지는 계속되기를 바라며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한국공포문학단편선 첫권의 미덕은 단순한 괴담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들어오거나 겪어왔던 이야기들을 소재로 채택했다는 점이었다. 뉴스에서 줄기차게 읊어대는 많은 고질병들을 이곳저곳 메스를 들이대고 끄집어내서 내/외부에 자리하고 있는 요소들을 잘 뽑아내었다고나할까. 그래서 한국공포문학단편선에서 '한국'이라는 고유명사가 유독 빛을 발했다.

이번 두번째 방문에는 9가지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몇몇 편은 전권의 기대를 만족시키기도 하지만, 몇몇 편은 고개를 갸우뚱 거리게 만드는 결말을 짓고 있다. 전체적으로 재미는 보장하지만, 마지막을 읽었을 때 '그래서 어쨌다는거지?'라는 의문이 고개를 쳐드는 작품들도 있다.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끝난다던가-내가 이해를 못한건가 싶기도 하지만- 아직 뭔가 더 있을 법한데 결말을 짓고 있어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다.

제일 재미있게 본 것은 김종일의 '벽', 김준영의 '통증', 안영준의 '레드크리스마스'였다. 김종일의 벽은 층간소음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던 한 부부가 히스테리를 일으켜 가정이 파탄나고 심지어 개인까지 소멸(!)해 버리는데 이야기인데 층간소음으로 인해 살인사건까지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잘 풍자하고 있고 그 속에 사람들이 받는 심리적인 압박감을 잘 묘사하고 있다. 사실 층간소음이라는 것은 유난스러운 사람들이 원인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1차적으로는 부실공사탓이다. 건물을 그렇게 지어놨으니 살고 있는 사람이 고통받을 수 밖에. 그래서 김종일의 '벽'이 보여주는 결말은 꽤나 의미심장하고 멋지다.

김준영의 통증. 어느날 치통을 느껴 찾아간 병원에서 의사는 유치가 자라나고 있다는 말을 한다. 사랑니가 아닌 새로운 치아가 잇몸을 뚫고 돋아나기 시작한 주인공은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치고 치아 뿐 아니라 손가락, 발가락까지 증식하게 된다. 혀가 갈라지고 온 몸의 기관들이 두배로 증식하는 신체적 변이의 묘사는 이 단편선집 중에서 가장 시각적으로 강렬한 재미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 주인공이 겪는 신체변화의 고통이 무엇에서 기인하는가에 관해서는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어 아쉬움을 남긴다.

안영준의 레드크리스마스.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세워진 부자아파트와 빈곤아파트. 부자아파트에 살고 있는 어린아이들은 빈곤아파트의 불쌍한 아이를 괴롭히고 집 잃은 개를 목 매달아 죽이고, 노인들에게 욕을 하고 거침없이 폭력을 행사한다. 한 노인이 이에 분개하여 아이들을 처단하는데 아이들을 처단하는 방법이 매우 마음에 든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어느 정도의 악의를 가질 순 있겠지만, 보통 그들은 후천적으로 둘러싸인 세계속에서 자신의 가치관을 만들어간다. 우리 시대의 잔인한 부모들은 자식을 악인으로 키워나가는지도 모른다. 가난한 자들에게는 언제나 마음 뿐만 아니라 몸이 더욱 시린 눈내리는 추운 겨울의 크리스마스에 죄인들을 쓸어버리는 산타클로스의 모습은 속이 후련하면서도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이 외에 히이하이킹을 통한 납치/감금, 장애인에 대한 차별, 인체실험, 미국사회에서의 인종차별 등 일상속에서 접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다양하게 풀어내고 있고 대체로 만족스럽다. 단편선 전체의 분위기는 19금의 영향 때문에 조금 얌전해진 경향이 있긴 하지만 역시 이번 '한국공포문학 단편선 - 두번째 방문'도 가벼운 마음으로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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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OZOO - 8점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황매(푸른바람)
ZOO는 17세에 데뷔작인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라는 작품으로 점프소설 대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장했다는 오치이치의 단편모음집이다. 문학계가 그만큼 활발하다는 증거겠지만, 일본은 무슨무슨 상이 저렇게나 많은지 모르겠다. 믿을만한 것인지도 모르겠고.

ZOO에는 열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우직한 공포소설부터 범죄추리, 잔혹코미디, SF등의 장르까지 다양한 입맛을 선보이고 있다. 대부분 인간이 죽음에 직면하거나 심리적으로 극한에 처한 상황에서 어떻게 이기적으로 변해가는지 혹은 자신을 파멸시키는지를 묘사하고 있으며 그 저변에는 슬픔의 정서가 깔려있다.

첫번째에 수록된 Seven Rooms과 Zoo그리고 몇개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심리묘사보다는 상황을 설명하는것으로 진행이 되는데, 이것이 독자가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을 막는다. 역자후기에서는 오츠이치의 작품들이 영상을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주고 문자와 영상의 중간에 놓인 작품이라 신기한 경험을 하게 해준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반대의 인상을 받았다. 이건 내 얘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끙끙대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는 느낌이 많이나서 가슴에 와 닿진 않았지만, 오츠이치가 보여주는 상상력만큼은 정말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괴한에게 납치된 어린 남매가 감금되어 죽음을 기다리는 'seven rooms', 서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엄마, 아빠 사이에서 그 둘의 모습이 모두 보이는 아들이 메신저 역할을 하는 'so far'. 여자친구를 죽여놓고 자신의 범죄를 외면하기 위해 살인자인 자기 자신을 뒤쫓는 'Zoo', 세상이 멸망한 후 유일하게 생존한 한 인간이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인지하고 외로운 최후를 맞지 않기 위해 사이보그를 만들어내는 '양지의 시', 타인의 신체와 정신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능력을 가진 소년이 결국 세계를 멸망시키는 '신의 말', 엄마와 쌍둥이 동생에게 학대를 당하는 소녀의 이야기 '카자리와 요코',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신의 비밀을 알아낸 남편의 동생을 살해하는 이야기 'closet', 사고로 통증감각이 마비된 사내가 칼에 맞고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상황에서 자식들과 벌이는 소동극 '혈액을 찾아라', 학대 받은 어린아이가 집을 나가 살인마가 되어 시체로 집을 지어 사는 '차가운 숲의 하얀집', 하이재킹 된 비행기 안에서 고통없이 죽을 수 있는 독약을 파는 세일즈맨과 젊은 시절 자신을 괴롭힌 남자를 죽이러가는 여인과 납치범이 벌이는 이야기 '떨어지는 비행기 안에서'

모두 단편집에 어울리게 그만한 상상력을 제공하고 so~so~ 정도의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데 이 중에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머리가 잘리도록 프로그램이 되어 시선이 마주친 사람들의 머리가 뚝뚝 떨어져 피바다를 이루는 '신의 말'과 첫번째 이야기 'seven rooms'는 정말 압권이다. 특히 납치된 뒤 죽음에 이르기까지 6일동안 공포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도록 구성된 seven rooms는 오랜만에 진정한 공포를 맛보게 해주었다. 만약 이 단편집을 직접 사서 보지 않더라도 70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이니 seven rooms는 서점에서라도 꼭 읽어보길 강추한다.

첨언
-. 책의 띠지에 기재된 광고문구가 정말 재미있다. '이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일본문학의 충격'. 솔직한 것 같기도하고 멍청하기도 한 것 같기도 한 저 들이대는 문장이라니... 흡사 공포영화 광고에 '이 영화 정말 무섭다'라고 써놓은 효과와 비슷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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