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인 인류학자 쟝샤를르는 방랑자를 쫓아다니며 연구하던 오랜 생활을 끝내고 로스앤젤레스의 UCLA에 교수로 부임해 오면서 미국인으로서 새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날 한무리의 폭력배일당을 만나게 된다. 쟝샤를르는 일은 전혀 하지 않고 하루종일 사람을 패고 죽이는 등의 범죄를 일삼으며 도시의 언저리를 배회하는 그들을 보며 사회의 어느 시스템에도 속하지 않고 스스로의 규칙대로만 살아가는 현대도시의 방랑자라고 생각하며 그들의 행동방식에 매료되어 뒤를 쫓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일행에게 들키게 되고 무언가 알수없는 악의적인 큰 힘에 지배되어 온몸이 난자당한체 병원 응급실에 실려오고 그를 담당한 여의사 플랙스에게 알수없는 프랑스어를 속삭이고 죽어버린다. 이 때 그의 악몽같은 기억이 여의사에게 전이되고 그녀는 그의 기억을 통해서만 현실을 보게 된다.

존 맥티어난 감독의 데뷰작인 노매즈는 현대 도시에서 살아가는 방랑자들을 보여주며 제도권에 속하지 못한 아웃사이더들을 절대악으로 규정한다. 영화의 시작은 쟝샤를르가 응급실에 실려오면서 부터 시작한다. 그러니까 영화는 여의사가 그의 기억을 전이받고 그가 미국에 온 10일동안 어떤 일을 겪었으며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의 기억과 그녀의 현실사이를 교차하여 보여준다. 영화속에 등장하는 이느와는 날고기를 먹는 사람이라는 뜻인 에스키모를 지칭하는 차별적인 용어 대신에 쓰이는 말이라고 한다. 노매즈에 등장하는 일련의 폭력배들은 그 이느와의 전설속에 등장하는 가까이 가서는 안되는 절대악의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은 보통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도시를 부유하는 유령들이며 우연히 보았다하더라도 가까이해서는 안되는 존재들이다. 그들과 접촉하면 죽음을 당하고 그들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주인공은 쟝샤를르는 미국에 오기전에는 폭력배들과 다름없는 방랑자였다. 평생을 유목민이나 이느와들을 쫓아다니다 정착해서 살려는 그가 이 폭력배 일당에게 이끌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고 그렇다면 그의 죽음은 그가 미국에 오면서부터 필연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마지막에 쟝샤를르가 또다른 폭력배가 되어있음을 보여주며 나름 깜찍한 결말을 맺고 있는데 결국 이런 노매드들이야 말로 자유롭게 살아간다는 것인지 그들이야말로 절대악이라는건지 해석하기 나름이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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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모호하지만 사회 언저리에 어떤 위협적인 거대한 악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판타스틱하게 보여주는그 분위기만큼은 일품이다. 이 폭력배들은 사진기에도 찍히지 않는 유령들이며 그들은 영화에서 말을 한마디도 안한다. 그래서 쟝샤를르가 그들을 추적하는 20여분 가까이 대사다운 대사는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영화는 대단히 느리지만 어둠속에 갇힌 도시의 시궁창 냄새나는 분위기나 골목골목의 을씨년스런 풍경들 그리고 도시 한가운데 있는 생뚱맞게 등장하는 장님 수녀가 있는 성당등의 으스스한 분위기는 만족스럽다. 그리고 현실에서 폭력배들을 쟝샤를르가 죽일 때 돌연 슬로우로 연출되어 현실속에 있는 다른 존재를 색다르게 보여준다. 프레데터나 다이하드나 라스트 액션 히어로 같은 울끈불끈함 말고 존 맥티어난의 이런 영화를 감상하는 것도 색다른 경험일 것 같다. 조금 의외이면서 놀랍기도 하고.

제목: 노매즈 (nomads, 1986)
감독: 존 맥티어난
배우: 피어스 브로스넌, 아담 앤트, 레슬리 앤 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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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 - 6점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황매(푸른바람)
오츠이치의 단편집 ZOO를 읽고 이런 아이디어와 상상력을 가진 작가가 17세에 쓴 데뷔작이 어떤 내용인지 몹시 궁금했고, 과연 장편에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솜씨는 어떨까하는 마음으로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를 골랐다. 일단 장편이 아니라 두편의 중편(‘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와 ‘유코’)이 실려 있어서 실망 아닌 실망을 했지만, 17세에 이런 소설을 쓴 '천재작가'라는 말에 어느정도 공감을 하긴 했다. 나이 어린 작가가 쓴 소설이라고 해서 점수를 더 줄 필요는 없지만, 읽고나서 '어린 친구가 이런 묘사도 가능하구나'라는 감탄이 들긴했다.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

-. 친오빠인 켄을 좋아하는 9살 야요이는 자기도 켄 오빠를 좋아한다 친구 사쓰키의 고백에 나무 위에서 떨어뜨려 사쓰키를 죽이게 된다. 사쓰키의 죽음을 목격한 켄과 야요이는 엄마에게 야단맞게 될까 무서워 사쓰키의 시체를 숨기게 된다. 하지만 켄의 행동은 단순히 엄마에게 야단맞기 싫어서라기 보다는, 소설에서 자세히 묘사되진 않지만 좀 더 근본적인 어둠을 갖고 타고난 아이이기 때문이 맞을 것이다. 영리한 켄은 사쓰키의 행방불명이 최근에 마을에서 발생한 일련의 아이들 실종사건으로 처리될 것을 알고 있었고, 이때부터 사쓰키와 야요이는 부모와 조카언니, 마을 사람들, 경찰의 눈을 피해 사쓰키의 시체를 처리하려고 밤마다 이리저리 시체를 들고 나른다.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는 죽은 사쓰키의 나레이션으로 진행이 되는 것이 특이한데, 어린 아이가 자신을 죽인 친구들이 시체를 이리저리 옮기는 것을 묘사하는데 감정을 싣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관조적으로 설명한다. 그래서 독자는 이 사체처리 소동극을 분노의 감정이 아니라 그들이 들키지 않게끔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되어 자연스레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이 부분이 바로 이 소설의 진정한 매력이 아닐까한다. 개인적으로 불꽃놀이가 벌어지는 화려한 하늘 아래서 야요이와 켄, 죽은 사쓰키의 시체 그리고 또 한명의 인물이 놓여있는 풍경은 슬프면서도 매우 아름답게 느껴졌다.

유코
-. 키요네는 마사요시라는 명문집안에 하녀로 들어가는데 이집의 분위기기 심상치않다. 매일 주인부부 내외의 식사를 준비하고 설겆이를 하고 빨래를 하는데, 키요네는 마사요시의 부인인 유코를 한번도 보지 못한다. 방안에 있다고 얘기는 하는데 심지어 그녀의 목소리조차 한번 듣지 못한다. 그러던 중 전에 일하던 하녀로부터 마사요시의 부인이 2년전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마사요시에게 연정을 품고 있는 키요네는 부인의 정체를 밝히고 안쓰러운 마사요시를 편안하게 해주고자 한다. 유코는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에 비해 비교적 내러티브가 탄탄하다. 키요네는 마사요시 집안의 기괴한 공기에 동화되어 자신의 불우한 과거를 끊임없이 회상하고 마사요시 집안의 뒤틀린 내력에 대해서도 인간의 탐욕스런 욕망과 업보를 씌우며 마지막에 반전까지 두고 있다.

나는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를 더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것은 내가 평범하지만 잘 짜여진 이야기보다 우연에 기대더라도 기괴하지만 불온한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이야기를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오츠 이치의 이 불온한 상상력은 ZOO라는 단편집 맘껏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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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라는 직업과 병원이라는 공간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종이 한장의 차이로 생과 사를 결정지을 수 있기에 언제나 공포영화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 왔다. 게다가 의사의 가르고 자르고 붙이고 꿰메는데 익숙한 손놀림이 살인을 위한 것일 때 섬뜩함은 더해진다. 영화 닥터 기글은 아쉽게도 외과수술적인 고어장면이 많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사이코 연쇄살인범이 등장하는 공포영화의 역사에서 빼먹고 지나가면 정말 섭섭해할 카리스마 강한 강력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심장병으로 죽은 아내로 인해 미쳐버린 렌달 박사는 자신의 환자들의 심장을 모두 빼내어 죽여버린다. 영화는 사건의 현장에서 사라진 렌달 박사의 아들-닥터 기글-이 정신병원에서 탈출해 다시 마을로 돌아와 사람들을 살해한다는 이야기이다. 기글은 다양한 의료기구들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도륙하는데 영화는 생각보다 그리 잔인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빛을 발하는 이유는 닥터 기글을 연기한 래리 드레이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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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악당의 외모를 가지고 있는 래리 드레이크의 연기가 아니었으면 이 영화는 그냥 묻혀 버릴 영화였겠지만, 그는 이 영화에서 샤이닝의 잭 니콜슨과 미져리의 케시 베이츠, 스텝파더의 테리 오퀸에 뒤지지 않을 명연기를 펼쳐준다. 낄낄거리며 웃는다라는 뜻인 giggle에서 알 수 있듯 닥터 기글이 포커페이스로 소름끼치는 웃음을 선사하며 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보면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게다가 그는 살인을 저지른뒤 의사가 환자들에게 덧붙이는 재치있는 한마디를 잊지 않는다. 체온계는 1분정도 물고 계세요, 청구서는 나중에 보내줄께요, 설탕과 지방은 몸에 해롭습니다 같은 유머러스한 대사를 읊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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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멋진 살해장면은 없지만, 한가지 명장면을 제공하고 있다. 렌달 박사가 자신의 아들을 마을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아내의 시체에 아들을 숨겨놓고 봉합해버렸는데, 시체실에서 이 아이가 엄마의 배를 찢고 나오는 그로테스크한 장면은 사이코 닥터의 탄생을 알리는 진정 명장면이다
.

닥터 기글은 수술에서 연상되어지는 살이 째지는 공포감이 더해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제법
유머러스하고 멋진 사이코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화다.  영화 마지막에는 래리 드레이크가 죽어가면서 뜬금없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고 관객을 향해 '누가 의사 좀 불러주세요'라고 대미를 장식한다.

첨언.
-. 심장이 약해 닥터기글에게 끊임없이 괴롭힘 당하는 역할로는 charmed에서 쉐넌 도허티, 알리사 밀라노와 함께 마녀자매로 등장한 귀여운 홀리 매리 콤즈가 맡고 있다.

제목: 닥터 기글 (Dr.Giggle, 1992)
감독: 매니 코토

배우: 래리 드레이크, 홀리 매리 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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